‘아가씨’, 박찬욱 감독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아가씨>는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삼는다. 박찬욱 감독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1930년대 식민지 조선으로 옮겨 놓는다. 영화 <아가씨>는 원작이 품고 있던 레즈비언 문학의 문제의식과 반전을 통한 긴장을 오롯이 살려낸다. 칸 국제영화제 벌컨상 수상이 말해주듯이, 영화의 미장센은 탁월하다. 요컨대 영화는 고혹적이고 탐미적이다. 스릴러적 긴장감이나 여성주의적 문제의식도 합격점이다. 하지만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 양식적인 화면 속의 거듭되는 반전

영화는 3부로 나뉜다. 1부는 하녀의 시선과 내레이션으로, 2부는 아가씨의 시선과 내레이션으로, 3부는 백작의 시선과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1부는 원작에 충실한 서사이나, 2부 중반부터는 원작과 다른 결말을 향한다. 영화는 원작이 지닌 출생의 비밀 등을 생략하고, 훨씬 간명하고 호쾌한 결말을 제시한다.

영화 <아가씨>는 범죄 집단에 속한 숙희(김태리)가 코우즈키 저택에 하녀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질감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양식적이다. 범죄 집단에 대한 만화적인 묘사나 백작이 리드미컬하게 읊어대는 범죄계획, 그리고 숙희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코우즈키 저택에 대한 묘사는 이것이 현실세계에 대한 모사(模寫)라기보다는 장르화 된 텍스트 안의 세계라는 느낌을 강하게 던진다. “양식과 일식이 합체된, 일본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의 건물”이라는 집사(김해숙)의 설명은 앞으로 관객이 보게 될 세계의 소개문과 같다. 즉 ‘서구의 소설에 일본의 미장센을 얹은 허구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뜻이다.

양식화된 세계에 인형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아가씨(김민희). 백작(하정우)이 처음 아가씨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 숙희는 “아가씨가 예쁘냐?”고 묻는다. 그리고 직접 보자마자 “아가씨가 예쁘단 말은 안했잖아”라고 웅얼거린다. 숙희는 아가씨를 돌보며 “내가 씻기고 입힌 것들 중 제일 예쁘다”고 감탄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 첫째는 숙희가 아가씨에게 느끼는 레즈비언적 욕망이고, 둘째는 하인이 주인에게 느끼는 주체성이다. 숙희는 하층민 여성이지만 당돌하고 주체적이다. 그는 계급적·성차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지만, 아가씨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백작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주눅 들지 않는다.



씻겨주고 입혀주며 정서적 교감을 나누던 아가씨와 숙희는 급기야 성관계를 맺는다. 시작은 아가씨와 백작과의 섹스를 염두에 둔 것이었으나, 두 여인이 몰입하면서 백작의 존재는 지워진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뭇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백작과 숙희의 사기극이 계속되는가 싶더니 숙희가 뒤통수를 맞는다. 이러한 1부의 결말은 2부를 위한 떡밥이다.

이 미완의 서사는 아가씨 관점에서 풀어내는 2부 서사에 의해 완벽하게 뒤집힌다. 순진한 듯 냉혹한 아가씨는 백작과 공모하여 숙희를 속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숙희를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 “물새처럼 차가워서 누구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던 아가씨의 분노표출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서로의 계략을 털어놓고 완전히 솔직해진 두 사람은 그동안 아가씨를 옥죄었던 남성적 억압의 상징물들을 부수고 탈주한다.



◆ 여성주의적 결말 속의 관음적인 시선

2부에서 드러나는 낭독회의 실체는 원작과 영화의 핵심이다. 영문학 박사로 19세기 영국 도색소설 연구자이자 레즈비언 작가인 사라 워터스는 전공을 살려 낭독회 장면을 그려냈다. 엄숙주의가 지배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수많은 도색소설들이 유행했다는 사실은 금기와 욕망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엄숙해 보이던 서가를 가득 메운 서적들은 모두 야설과 춘화가 담긴 책들이었다.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억압 속에서 완벽한 낭독자로 훈육된 아가씨는 잘 차려 입은 신사들 앞에서 도색소설을 구연(口演)한다. 남성 청자의 부족한 상상력을 돕기 위해 아가씨는 인형과 더불어 체위를 시연하기도 한다. 어린 여성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남성들의 성적 상상의 매개물로 쓰는 것은 성적 착취이다. 서가의 입구에는 발기된 남근을 상징하는 뱀의 모형이 있다. 또한 지하에는 여자의 성기를 비롯한 잘린 신체의 일부들이 가득하다.



영화 <아가씨>는 해석의 여지없이 분명한 상징과 명쾌한 결말을 통해, 여성의 탈주와 남성의 자멸을 대비킨다. 숙희와 아가씨가 계급 차와 속임수를 뛰어넘어 서로 사랑에 이르고, 의기투합하여 탈주에 성공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호쾌하다. 특히 아가씨가 백작과의 첫날밤에 자위로 오르가슴에 이르거나, ‘여자들은 강제로 섹스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도색소설 속 판타지를 정면으로 비웃으면서 백작을 엿 먹이는 장면은 통렬하다.

원작보다 늘어난 3부의 백작과 코우즈키에 대한 묘사는 남성적 실패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 집의 모든 여자들을 유혹할 수 있으나, 단 한 명은 불가능하다”는 백작의 허세에 코우즈키는 몸이 달아 묻는다. “집사는?” 자신의 전처였으며 여전히 섹스파트너인 집사에 대해 백작이 ‘아주 쉽다’고 답하자, 코우즈키의 얼굴이 이지러진다. 그들은 아가씨가 유혹하기 쉬운 여자인가 어려운 여자인가를 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여성들의 존재와는 무관한 남자들끼리의 뒷담화. 이들은 다시 만나 진지한 대화를 이어간다. 코우즈키가 백작의 손가락을 자르며, 아가씨와의 첫날밤을 캐묻는다.



남성적 질서 속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당했던 두 여성이 담장을 넘고, 초원을 달리고, 온몸으로 섹스하고,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남자들은 절단된 신체 조각들이 가득한 지하실에서 여성들의 몸과 시간을 절취해서라도 갖고 싶은 변태적인 집착에 사로잡힌 채, 손가락을 자르고 수은가스를 내뿜으며 죽어간다. 그나마 성기는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백작의 마지막 말은 “애기 장난감 같은 그것”이라는 숙희의 대사와 맞물려 쓴웃음을 자아낸다.

이토록 분명한 여성주의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제시하는 여성주의는 너무 도식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유가 뭘까. 두 여성이 처음 가졌던 섹스신은 “백작이 이렇게 부드럽게 해줄까?”라는 말처럼, 이성애 섹스와의 대비 속에서 배려의 의미가 짙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들의 섹스신에는 관음적인 시선이 강하게 드리워진다. 두 여성이 손을 맞잡은 섹스신은 탐미적인 화면을 얻어내려는 착취적 시선이 느껴지고, 마지막의 쇠구슬을 이용한 섹스신은 묘한 불편함을 안긴다. 아가씨를 훈육했던 억압의 상징물인 쇠구슬을 혀로, 몸으로 품고 희롱하는 것은 억압에 대한 조롱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아가씨가 신사들 앞에서 읽어주던 소설 속 “면령(勉鈴)” 장면의 실연(實演)이다. 도색소설의 내용을 다시 재현하는 마지막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은 감독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메타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즉 아가씨가 낭독하던 도색소설을 듣는 신사들의 자리에 관객들의 자리가 포개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메타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무국적의 변태 오타쿠는 누구?

박찬욱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영화가 무가치하다는 질문이 아니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원작소설을 왜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가져오고 싶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물론 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일단 소설에 매료되었을 테고, 그것을 무국적의 혼종성을 살려 번안하고 싶었을 것이다. <박쥐>이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박찬욱의 서구문학에 대한 오마주이다. 에밀졸라의 <테레즈 라켕>을 일본식 적산가옥의 한복집을 배경으로 펼쳐 보일 때, 거기에서 한국의 시공간은 희한한 키치가 된다. 역사적 구체성을 띄는 배경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짜깁기의 악취미적 재료를 제공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아예 할리우드에 가서 찍은 <스토커>는 뱀파이어가 나오지 않는 뱀파이어 물로, 제목부터 브람 스토커를 연상시키는데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딕문학의 냄새를 풀풀 풍겼다. 박찬욱에게 있어서 이미 국적성은 중요하지 않다. 서양고전이나 서구문화사에 대한 애호, 탐미적이고 도착적인 취향을 위주로 하는 박찬욱의 영화세계는 1세계인에 가깝다. 이를테면 그에게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은 1세계인이 변방의 이국취향에 갖는 관심처럼 보일 때가 많다.



서구 지식인의 정신세계에 강한 친연성을 보이는 박찬욱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조선의 문화가 후진적인 찌꺼기로 남아 있는 그 위에 일제가 들여온 근대문화가 위용을 과시한다. 일본이 들여온 근대는 서구문화를 일본식으로 번안한 것이다. 영화의 주 배경인 저택은 영화의 정신적 지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양식과 일본식이 결합된 독특한 주 건물, 그리고 조선인 하인들이 머무는 한옥. 영화는 대사의 절반 이상이 일본어이고, 시각적 효과의 대부분은 일본적이거나 일본+서구의 혼종이다. 관객의 찬탄을 자아내는 아가씨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라. 일본 여배우 히데코의 이름을 딴 아가씨의 자태는 어떤 일본영화 속 장면보다 더 일본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원작소설을 1930년대 식민지 조선으로 옮겼을 때,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1930년대 조선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성적 금기가 없지 않은가? 1930년대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부르주아 남성들이 비밀스레 모여 도색소설의 낭독을 들으며 상상적 차원에서 성욕을 해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정말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권번을 가든, 구락부를 가든, 가난한 조선인 여인을 사든 마음껏 성욕을 풀 수 있다. 당시 일제는 남성들의 성욕을 금기시하기는커녕, ‘위안부’를 운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은 박찬욱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1930년대라는 시대의 화려함을 서구적으로, 또 일본적으로 멋지게 변주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식민지 조선인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저택의 행랑채에 있는 하인들, 숙희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이 보여주듯이, 조선의 문화는 하급문화로만 존재한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의 모습은 전형적이다. 서구인 혹은 일본인의 관점에서 조선의 미개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자주 활용되던 컷이다.

“일본은 아름답고, 조선은 추하다” 이것은 코우즈키의 말이다. 그런데 코우즈키는 원래 조선인이었다. 역관출신으로 돈을 벌어 일본에 귀화하였고,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일본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서구와 일본의 서책을 사랑하여 비싼 값에 사 모은다. 프랑스인의 서재를 통째로 사고 싶어 한다는 대사는 인상적이다. 서구지성사에 대한 굉장한 애호를 보이는 듯한 코우즈키는 사실 포르노수집광이다. 마지막에 그는 “나는 더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노인일 뿐”이라 말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박찬욱이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1930년대 식민지 조선으로 가져 온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자신의 서구문학에 대한 오마주를 실현시킬 수 있는데다, 당시 서구문화를 흠모했던 일본인이 서구+일본의 혼종문화를 만들었다는 가정 하에 서구+일본이 뒤섞인 극한의 혼종성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조선인이면서 일본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코우즈키, 외국어를 통역하고 번역하는 일을 하다가 뼈 속까지 일본인이 되고 싶어진 코우즈키, 서구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결합된 저택에 살면서 프랑스인의 서재를 통째로 사고 싶은 코우즈키, 굉장한 서책광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코우즈키, 신체절단을 즐기는 변태적인 코우즈키, 여자들을 훈육하여 야설을 구연시키고 소설 속 장면을 시연시키는 코우즈키. 자, 마지막 쇠구슬 섹스신을 통해 소환된 메타성을 통해 코우즈키를 해석해 보면 누가 떠오르는가. 외람되게도 코우즈키의 자리에 박찬욱이 놓인다.

<아가씨>는 세련된 연출과 문화적 혼종성이 돋보이는 텍스트로, 원작이 지닌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명쾌하게 풀어낸다. 물론 재미도 있고 볼거리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수작으로 상찬하기는 힘들다. 남성이 레즈비언 텍스트를 만들거나, 한국인이 일본 혹은 서구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화적 풍부함의 측면에서 보자면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레즈비언 텍스트 속에 남성적 관음의 욕망이 스미고, 문화적 혼종성 속에 스스로 조롱하듯 묘사해 놓은 식민지 지식인의 무의식이 스민다면 곤란한 노릇이다. <아가씨>를 보고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스크린 밖으로 수은연기가 자욱하게 느껴진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아가씨>스틸컷, 메이킹필름]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