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영화 ‘우리들’이 일러주는 녹록치 않은 교훈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우리들>은 단편영화 <손님>으로 클레르몽페랑국제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고, <콩나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정곰상을 수상한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우리들>은 이전의 두 단편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최우수 장편 데뷔작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우리들>은 11살 소녀들의 일상을 면밀하게 비추며, 인간관계의 비릿한 통증과 기묘한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들>이 가장 돋보이는 측면은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자연광을 최대한 이용한 화면은 다큐멘터리의 질감이 느껴지고,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아이들의 연기는 마치 자신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윤가은 감독은 이처럼 자연스러운 장면을 얻기 위해, 통상적인 연기지도가 아닌 연극놀이와 상황놀이로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쪽 대본으로 즉흥연기를 이끌어내고, 두 대의 카메라로 찍은 화면들 중 자연스러운 장면들을 골라냈다고 한다.

◆ 아이들은 순진한가, 잔혹한가

영화 <우리들>은 아이들의 일상을 비추는 극영화이지만, 웬만한 멜로 못지않은 밀도와 긴장감을 지닌다. 인물들 간의 감정의 변이가 대단히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한 장면도 덜어낼 수 없는 단단한 구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소리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선(최수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비추며 시작된다. 이게 무슨 장면인가.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기 위한 편을 가르기 위해, 양 편의 대표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쪽이 마음에 드는 아이들을 자기편에 데려가는 중이다. 그런데 선은 끝까지 선택되지 못하고, 마지막 남은 한명으로 어느 편엔가 들어간다. 그리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금을 밟았으니 나가라는 말을 듣는다. 금을 밟지 않았다는 선의 항변은 간단히 무시된다. 선택되지 못하고, 추방되는 아이. 왕따에 대한 이보다 압축적인 묘사가 있을 수 있을까. 영화는 짧은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선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으며, 아이들 사이의 따돌림은 이처럼 미묘하고 무심하게, 그리고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보라(이서연)가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생일과 청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근처에 선이 와서 바닥에 떨어진 보라의 생일초대장을 주워 “이거...”하고 말한다. 장면이 바뀌면 보라의 생일에 초대된 줄 안 선은 선물용 팔찌를 만들고 보라와 친구들 대신 청소를 하고, 보라의 집에 간다. 그러나 생일초대장은 가짜였다! 아이들은 초대받기를 원하는 선에게 대신 청소를 시키고 자기들끼리 따로 논 것이다. 여름 방학식날 혼자 남아 청소를 하던 선에게 그래도 좋은 일이 생긴다. 2학기부터 등교할 전학생 지아(설혜인)를 처음 만나 친해진 것이다. 방학동안 선은 지아를 일주일간 집에 초대해 함께 지낸다. 선의 집은 가난한 편이고, 지아의 부모는 이혼을 하였지만, 두 사람이 친할 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서 그런 모든 것들이 불만과 짜증의 빌미가 된다. 선 모녀의 다정한 모습에 질투가 난 지아는 선이 자신의 휴대폰을 쓴다고 짜증을 낸다. 학원에 다니게 된 지아는 보라와 친해진다. 개학 후 지아는 보라의 친구들과 함께 선을 따돌린다. 지아가 알고 있던 선의 비밀들은 조롱거리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국면은 지아가 2학기 첫 시험에서 1등을 함으로써 급변한다. 1등을 빼앗긴 보라가 이제 지아를 따돌림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선이 알고 있던 지아의 비밀들이 공격의 재료가 된다. 선과 지아가 서로의 비밀을 폭로하며 회복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보여주던 영화는 다시금 화해의 계기를 영화 속으로 불러들인다.



◆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

영화 <우리들>이 보여주는 11살 여자아이들의 세계는 인간관계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무심한 선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일 있을 게 뭐 있어.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들 하고 놀고 그러면 되지.” 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또래집단이라는 사회에 진입한 순간부터 인간관계의 고민은 시작되고,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들을 겪는다. 정주고 믿음주고 사랑 주는 모든 일들과, 다투고 배신당하고 헤어지는 일들로 괴로워한다.

영화는 진심으로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선과 지아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광경을 보여준다. 서로의 우정을 공고하게 했던 추억들과 은밀하게 털어놓았던 가슴 아픈 상처들이 다른 아이들의 입을 통해 증폭됨으로써 서로에게 꽂히는 비수로 돌아온다. 서로가 서로를 왕따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싸우는 동안, 아이들은 그런 두 사람을 조롱하며 싸잡아 경멸한다. 이 권력과 인정욕구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영화는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던 국면에서, 선의 내면을 움직일 수 있는 두 개의 깨달음을 햇빛처럼 비춘다. 첫째는 자신의 아버지와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은 중년남자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선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찾지 않는다. 별다른 애증이 없는 선의 어머니는 도의상 시아버지를 찾아뵙지만, 원한으로 가득 찬 선의 아버지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채 그런 아내를 오히려 나무란다. 그러나 끝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맞은 영원한 이별은 깊은 회한을 남긴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아버지의 회한을 본 선은 무엇을 느꼈을까.



둘째는 죽비처럼 내리꽂히는 어린 동생의 한마디다. 친구의 과격한 장난으로 상처를 달고 사는 동생에게 선은 “맞았으면 너도 때렸어야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면 언제 놀아?”라고 말한다. 보복하고픈 마음보다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그냥 놀았다는 것이다. 동생의 말은 선에게 명쾌한 깨달음을 안긴다. 싸움이나 보복이 아닌 친구하고픈 마음이 앞선다면 다시 화해를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봉숭아물과 매니큐어를 통해 선의 마음 속 시계를 잘 보여준다. 지아와 함께 지냈던 추억을 상징하는 손톱의 봉숭아 물, 그 위에 보라에게 얻은 매니큐어가 덧발라졌다. 그러나 매니큐어가 벗겨진 손톱 위에 초승달 모양의 봉숭아물이 남아 있다. 지아와의 추억의 시간이자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은 것이다. 영화는 오프닝시퀀스에서 보여주던 똑같은 방식으로 피구에서 내쳐지는 지아를 위해 한마디를 건네는 선을 보여준다. 선의 발언으로 지아가 구제되지만, 들어가자마자 간단하게 아웃 당한다. 둘이 친해지더라도 이들을 향한 아이들의 멸시가 사라지진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제 둘은 혼자가 아니며,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지아와 선의 희미한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 왕따를 극복하는 법, 탈주와 연대

영화 <우리들>은 아이들의 일상과 관계를 담고 있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과 묵직한 교훈을 담는다. 따돌림은 어떻게 일어나며,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얼마나 잔혹한가, 그리고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은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영화는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탈주의 가능성도 보여준다. “왕따끼리 뭐하냐?....진작 니들끼리 놀 것이지 왜 자꾸 우리들 노는데 끼어들어서...” 라는 아이들의 말은 경멸의 말인 동시에 해방의 말이다. 주류에 끼고픈 욕망, 인정욕구, 권력에 대한 선망 등을 품은 채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가학과 피학의 쳇바퀴를 돌지 말고, 차라리 왕따임을 인정하고 또 다른 왕따와 연대하는 길을 택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길이다.

미움보다 사랑이 먼저다. 그리고 연대가 곧 해방이다. 아이들 영화 <우리들>이 일러주는 녹록치 않은 교훈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우리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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