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 안성기의 가치만 확인시킨 영화 ‘사냥’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사냥>은 안성기, 조진웅 주연에 <최종병기 활>과 <끝까지 간다>의 제작진이 만들었다는 홍보문구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말이 필요 없는 국민배우 안성기가 오랜만에 주연을 맡은데다 요즘 한창 연기력이 물오른 배우 조진웅이 출연하고, <최종병기 활>과 <끝까지 간다> 수준의 장르물을 만들 실력이라면 결코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거기다 한예리, 손현주까지 출연한다니 어쩌면 수작일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눈여겨봤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감독이 김한민이 아니라 <첼로 : 홍미주 일가 살인사건>을 찍었던 이우철이라는 사실이다.

<사냥>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영화이다. 장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요소가 뒤섞여 있다. 그것을 조율하거나 선택과 집중을 꾀해야 했지만, 감독은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 결과 영화는 느닷없고 공허하다. 서로 다른 극성을 지닌 장르가 영화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재앙의 형국이 벌어진 것이다.

◆ 개연성도 없고, 인물에 대한 묘사도 없는

영화 <사냥>은 15년 전 탄광 붕괴사고로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갱도 입구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쁘지 않다. 굉장한 슬픔과 먹먹함, 생목숨을 집어삼킨 어두운 갱도의 음습함이 짐승의 아가리처럼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좋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어떤 비밀스러운 사연과 추격의 긴장감이 오롯이 살아있는 장르물이 될 것 같은 기대를 품게 한다. 산에서 금맥을 발견한 할머니가 경찰 동근(조진웅)을 부르고, 동근이 자신의 쌍둥이 동생 명근 일행을 불러 금맥을 살피게 하는 장면까지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할머니와 실랑이가 붙는 장면부터 영화는 박자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일행에 대한 할머니의 반응은 과도한 면이 있다. 할머니는 동근과 신뢰하는 사이였던가? 아주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나온 금맥을 신고할 때 어떤 신중함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둘은 그리 신뢰하는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너희들은 절대 손을 못 대도록 하겠다며 길길이 뛰는데, 깊이 신뢰하는 사이였다면 반응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 영화는 할머니의 분노를 설명하려는 듯 과거 장면을 보여준다. 그 땅이 사기를 당해 사들인 땅이고, 그로 인해 며느리가 죽었다는 사연이다. 그런데 일행들 중 사기에 가담한 사람이 있었던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일행의 면면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뭉뚱그려서 엽사일행으로 그린다. 나중에 이들이 토목과 교수, 공무원, 대부업자, 현직 경찰 등으로 구성된 사람들이라는 것은 한 줄 대사로 처리된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개개인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심지어 조진웅이 쌍둥이라는 1인 2역 설정도 변별되지 않은 채 묻혀 들어가 서사에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누가 중간에 총을 맞든, 양복쟁이(권율)가 죽은 자의 등산화로 갈아 신더니 총잡이로 변신을 하든,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사냥>은 감정이나 개연성을 차곡차곡 쌓아서 관객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상황을 제시하고는 그 이유로 과거의 무거운 장면을 들이민다. 하지만 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결여되다보니,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상황을 디테일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 결과 서사는 붕 뜨고, 모든 사건이 우연에 의해 벌어진다.



◆ 도대체 장르가 뭘까

할머니가 우연히 사고를 당하고, 이를 계기로 일행들의 탐욕과 살의가 솟는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영화적인 설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 자체에 재미를 부여하는 영화도 여럿 존재한다. 이를테면 <조용한 가족> <시슬리 2Km> <구타유발자들> 등등. 이런 영화들이 추구하는 바는 분명하다. 애초에 부조리 코믹극을 표방하기 때문에, 우연에 의한 돌발 사고나 인물들끼리 주고받는 썰렁한 개그는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높인다. 하지만 <사냥>이 부조리 코믹극을 지향하고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영화의 다른 한편에는 참사의 기억과 가족신파가 내장되어 있다. 영화의 앞부분은 참사의 기억에, 뒷부분은 가족신파에 많은 장면을 할애한다. 이것 역시 무의미하진 않다. 모든 동기를 혈연으로 돌리는 가족신파는 진부하지만, 참사의 기억에 대한 상이한 태도는 추출할만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 문제는 영화가 이러한 요소들을 추격액션의 장르 속에 녹여내지 못하고, 외삽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수시로 과거장면을 소환하며 슬픔과 기괴함이라는 분위기를 강요한다. “오늘 같은 날에 사냥이라니!” “그 산엔 유령만 존재해”라는 손반장(손현주)의 인위적인 대사를 보라. 영화는 끊임없이 참사로 죽은 십여 명의 광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며, 또 한편으로는 껄렁한 농담 따먹기를 하는 중이다. 가령 “뭐야, 람보야?” “내가 황해의 추격자도 아니고” 라는 자기-희화적인 대사는 전형적인 코믹극의 대사이다.

한쪽에서는 참사와 가족신파가 영화를 잡아당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부조리 코믹극이 영화를 잡아당긴다. 그 사이에서 영화는 산악 추격액션을 찍어야 하는데, 도통 긴장이 따라붙질 않는다. 긴장이 붙을 만하면 신파가 잡아끌고, 긴장이 불을 만하면 “람보야?”라는 대사로 김을 뺀다.



그 와중에 문노인의 정체에 대한 희한한 밑밥이 깔린다. 인육을 먹으며 살아남았던 기억으로 날고기를 먹는다? 이건 참 회수할 수 없는 떡밥이다. 영화는 도입부에 재미삼아 멧돼지를 죽이는 엽사들을 보여주고, 그 옆에 새끼 돼지를 등장시킨다. 이 장면은 문노인이 죽은 멧돼지를 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들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엽사들은 측은지심이 없고 탐욕에 물든 자들이며, 이들의 잔혹함은 양순(한예리)을 보호하려는 문노인의 부성애와 대비된다는 배치이다. 여기서 죽은 멧돼지를 내려다보는 문노인의 시각은 측은지심으로 읽힌다. 하지만 문노인의 정체를 영화가 괴물처럼 제시한다면, 앞의 장면은 뭐가 되는 걸까. 문노인이 입맛을 다시며 바라본 것이 되는 걸까.

인물에 대한 감정을 배반하는 떡밥에 노인의 식육장면이 겹치면서 관객의 뇌리엔 ‘뭐야, 곡성이야?’하는 소리가 스친다. 산, 노인, 식육 그러고 보니 <곡성>의 산 추격 장면과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곡성>이 환기될수록 영화에 대한 평가는 박해질 수밖에 없다. 주제의식을 떠나, 장면의 밀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국민배우 안성기의 가치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널을 뛰는 형국에서, 그나마 영화를 지킨 것은 배우들의 힘이다. 사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진웅의 연기력은 거의 발휘되지 못했으며, 문노인의 딸로 분한 신동미나 손반장으로 분한 손현주의 대사는 어색하고 과장되게 들린다. 이들이 결코 연기력이 떨어지는 배우들이 아님을 감안할 때, 이는 전적으로 감독의 책임이다. 그나마 제 실력을 발휘한 사람은 안성기와 한예리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안성기는 캐릭터를 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우로서, 영화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었다. 65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그는 엽총을 메고 산에서 뛰고 구르고 물에 빠지는 액션을 소화하였다. 더구나 여러 비밀을 품은 인물이라는 설정까지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극히 섬세한 감정연기를 요했던 <화장>에 이어 육체적인 힘을 폭발시키는 <사냥>에 이르기까지, 주연배우 안성기의 가치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사냥>에 영화적인 가치가 있다면, 오로지 안성기라는 배우의 건재함을 확인시켜주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사냥>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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