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캐스팅의 좌우대칭은 심각하게 망가져 있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얼마 전에 개봉된 20세기 초반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을 다룬 <서프러제트>를 보면 주연인 캐리 멀리건 캐릭터의 남편으로 벤 휘쇼가 나온다. 그리고 영화를 보신 분들은 동의하실텐데, 그의 역할은 참 찌질하고 하찮다. 심지어 그는 악당도 되지 못한다. 그냥 딱 당시 보통 영국 남자들의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그 정도. 벤 휘쇼의 팬이라고 해도 그 캐릭터에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야 말로 휘쇼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에 대한 증거이다. 바로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이 배우로서 할 일이니까.

<서프러제트>는 남자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어려웠던 영화이다. 여성 위주의 영화이고 긍정적인 남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거절 끝에 벤 휘쇼와 브랜든 글리슨이 캐스팅되었는데, 휘쇼 연기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지만 글리슨도 참 연기를 잘 한다. 그리고 여기서 연기를 잘 한다는 것은 나름 신념을 가진 경찰관으로서 자신의 캐릭터를 잘 살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연배우인 캐리 멀리건의 역할을 단 한 번도 가로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멀리건이 이 영화의 아리아라고 할 수 있는 명대사들을 뿜어낼 때 글리슨은 거기에 딱 맞는 정도의 존재감과 리액션만을 보여준다.

여전히 이런 장면에서 격찬을 받아야 할 배우는 캐리 멀리건이다. 하지만 모든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앞에 있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뒤에 있어야 한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 상식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앞에서 <서프러제트>의 남자배우 캐스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뒤집어보자. 남자배우 위주이고 여성 캐릭터가 조연이거나 부정적인 인물만 있는 경우에도 캐스팅이 마찬가지로 어려운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역할을 하는 배우들은 쟁쟁한 영화상들을 수상한 베테랑들이다. 수퍼히어로의 여자친구처럼 도구적인 역할에도 기네스 팰트로나 나탈리 포트먼과 같은 아카데미 수상자들이 붙는다. 배우와 캐릭터의 성만 따진다면 영화계 캐스팅의 좌우대칭은 심하게 망가져 있다. 휘쇼와 글리슨의 에고 없이 담담하고 억제된 연기가 희귀한 미덕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 <비밀은 없다> 이야기를 해야겠다.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정보를 드리자면, 실종된 딸을 찾는 엄마 이야기를 다룬 손예진 주연의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여자들 이야기이다. 손예진은 당연히 원톱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들도 손예진 캐릭터의 딸과 그 딸의 친구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들은 모두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물론 예고편과 시놉시스만 보면 잘 모른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남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니 많은 사람들이 이게 뭔가 정치와 관련된, 그러니까 남자들의 ‘큰 일’과 관련된 사건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기대를 일부러 깨는 것이 이 영화의 스토리이다. 그리고 이 스토리의 논리 전개는 지극히 명쾌하다.

그런데도 수많은 관객들이 이에 적응하지 못한다. 남자들이 잔뜩 나왔고 그들이 정치라는 엄청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영화 속에서 비중이 낮다는 사실을, 심지어 제대로 된 악역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 상당수가 손예진의 남편으로 나오는 김주혁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지? 왜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조금 나오지? 이해가 안 돼.



김주혁 탓일까? 아니, 그건 전적으로 관객들 탓이다. 연기만 보면 김주혁은 그냥 훌륭하다. 그리고 그 훌륭함은 앞에서 언급한 벤 휘쇼와 브랜든 글리슨의 것과 같은 종류이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의미와 비중을 알고 딱 그 정도의 무게감과 간결함으로 연기하는 것.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정확하게 안다.

전에 영화 <아가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자들이 너무 많고 비중도 지나치게 크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비밀은 없다>는 <아가씨>에서 남자배우들, 특히 하정우의 연기가 어땠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아가씨>를 보고도 남자들이 너무 약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그냥 암담한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나와 관객들이 익숙해져야하겠지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비밀은 없다><서프러제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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