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좀비액션물이자 윤리적 화두를 던지는 ‘부산행’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부산행>은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좀비액션 블록버스터로, 박진감과 타격감이 뛰어난 영화다. 영화는 한국산 재난영화답게 전문가나 책임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좀비의 유래를 비롯한 재난의 성격을 설명하지 않은 채, 오직 재난에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상황에 집중한다. 영화는 불신과 배척이라는 사회극의 양상을 잠시 보여주지만, 그것에 몰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극한의 상황에서 취하는 인간의 선택을 보여주며 화두를 던지는 윤리극에 가깝다. 영화는 선악의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지만, 석우(공유)의 변화된 태도를 통해 어떤 생존의 윤리를 취해야 하는지 제시한다.

영화는 기차라는 설정을 잘 활용한다. 열차는 길고 좁으며, 칸칸이 나눠진 폐쇄적인 공간이다. 여기에 좀비와 생존자가 함께 갇혀있다. 어떻게 좀비를 막고 살아남을 것인가. 또한 기차는 앞으로 달리는 존재다.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어떤 상황이 맞을지 알 수 없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극의 긴장감을 잘 살려낸다. 가령 대전역에 내린 승객들은 기대와 전혀 다른 상황을 접하고 허겁지겁 다시 열차에 오른다.

9호 칸에 오른 세 남자가 13호 칸에 갇힌 가족을 만나기 위해 좀비들을 무찌르며 한 칸 한 칸 전진하는 장면은 독특한 타격감을 제공한다. 무기라고는 맨주먹과 곤봉, 야구방망이 밖에 없지만, 총알이 난무하는 어떤 좀비액션물 보다 강렬한 쾌감을 안긴다. 좀비와 대결해가며 점차 좀비의 속성을 터득한 인물들이 이를 활용해 좀비를 따돌리는 장면은 적절한 유머와 긴장감을 자아낸다.

동대구역에서 펼쳐지는 예기치 못한 격전은 영화가 블록버스터 급임을 증명한다. 영화는 잠시도 쉴 짬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며, 서울역-천안·아산역-대전역-동대구역-부산역에 상응하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흐름을 충실히 이행한다.



◆ 아무도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영화 <부산행>은 뚜렷한 좀비액션극의 형태를 취하지만, ‘좀비’라는 말이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에 탑승한 인물들의 시선에 맞춰져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접하는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정보만 관객에게 노출시킨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좀비의 징후는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소녀(심은경)의 이상증상이다. 영화는 편집의 트릭을 이용하여, 소녀와 노숙자를 교차편집 한다. 승객들이 노숙자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실랑이하는 동안, 다른 칸 통로에서 소녀가 발작을 일으킨다.

이를 도우려는 여승무원을 소녀가 문다. 그러니까 승객들이 가장 먼저 본 좀비의 모습은 어깨에 올라탄 소녀에게 목을 물어뜯기며 비척비척 통로로 걸어 들어오는 여승무원의 모습이다. 이런 기괴한 광경에 객실 가득 타고 있던 고교야구부원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어-어-” 하다가 좀비에게 도륙 당한다.

열차 안팎에서 좀비가 날뛰는 상황이지만, TV에서는 “전국에서 과격 폭력시위가 일어났다”는 뉴스와 함께 “잘 진압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정부발표가 나온다. ‘좀비’라는 단어는 승객들이 보는 스마트폰에 ‘실검 1위’로 등장할 뿐, 아무도 좀비에 대해 묻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승객들 중에서 “저것은 좀비이니, 어찌 어찌 해야 한다”며 아는 체를 하는 사람도 없다. 영화는 왜 이런 일이 생겼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해결될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8월에 개봉될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이를 얼마나 다룰지 알 수 없지만, <부산행>은 좀비에 대한 설명을 배제한 채 재난을 맞은 사람들의 반응에 집중한다.



영화 <부산행>이 재난의 성격을 설명하지 않는 것은 연작의 존재와 무관하게 일종의 은유로 읽힌다. 영화는 지식을 일종의 풍문처럼 다룬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누구도 어떤 해석을 내놓지 못하지만, 인물들은 당장 닥친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물들은 아무런 앎이나 믿음의 체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아는 것은 TV에서 하는 말이 헛소리이고, 정부에게 기대할 게 없으니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불신에 쐐기를 박는 것이 대전역에서 맞닥뜨린 현실이다. 군대에 의해 도시가 봉쇄되었다는 소식에 석우는 국가의 검역망을 몰래 빠져나가려는 꼼수를 쓴다. 그러나 빠져나가고픈 절대적 힘으로 존재하리라 믿었던 공권력은 이미 붕괴되었다. 군복을 입은 채 우글우글 쏟아져 내리는 좀비 떼는 기표적으로는 구제역 창궐을, 기의적으로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각인된 국가의 무능력을 즉각적으로 환기시킨다.



◆ 협력할 것인가 경쟁할 것인가

요컨대 영화는 한국재난영화의 전통이자 한국사회의 반영이라 할 만한 국가의 무능과 부재를 어김없이 드러낸다.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렇다면 국가가 부재한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영화에서 선악은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러 겹의 아이러니를 지닌다. 재난이 시작되기 전 석우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개미들의 피를 빠는” 펀드매니저이고, 딸에게 양보하지 말고 자기 먼저 챙기라고 가르치는 아빠다. 딸은 “아빠가 자신만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엄마도 떠난 것”이라 말한다. 그가 처음 좀비와 맞닥뜨렸을 때, 상화(마동석)를 남겨둔 채 문을 닫았다가 그의 격한 항의를 듣는다. 이후 석우는 눈앞에서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 일을 똑같이 당하게 된다.

두 번의 문 닫힘 사이에, 석우는 상화와의 팀플레이를 통해 함께 살아남는 경험을 하고, 혼자 살아남으려는 것이 좋은 전략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지만 타인을 배척함으로써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그들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다. 초반의 석우에게 성경(정유미)이 말했듯이 “너무 두려워서” 그리할 뿐이다. 그들은 협력을 체험하기 전의 석우와 같은 상태다. 상화는 처음부터 협력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고, 용석(김의성)은 경쟁에만 길들여진 인물이다. 그 사이에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석우는 경쟁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협력을 경험하며 변화한다. “왜 그랬어? 다 들어올 수 있었는데!” 석우가 안타깝게 분노하지만, 이것은 협력을 경험해 본 사람의 눈에만 들어오는 대승적 인식이다.



영화는 석우 일행을 사이에 두고, 뒷 칸의 좀비들이 문을 열려는 상황과 앞 칸의 승객들이 석우 일행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상황을 맞물려 놓는다. 앞 칸의 승객들이 보기에 피투성이가 된 채 문을 두드리는 석우 일행이 마치 좀비 같다. 물론 그들도 석우 일행이 좀비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좀비에 대한 확실한 앎도 없는데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있는 상태에서 “저들은 감염되었다”는 말은 즉각적인 배제의 효과를 발휘한다.

용석의 선동으로 생존자를 버리는데 동조했던 승객들은 분노하는 석우를 감염자로 몰아세우는 용석의 말에 쉽게 수긍하며 그들을 추방한다. 용석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죄의식을 마주하기 싫은 것이다. 이후 영화는 연대와 협력이 아닌 공포와 배제의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한 공동체가 얼마나 허약한지 보여준다. 집단적인 죄의식을 억압하며 살아남은 공동체는 강력한 내부단속이 없으면 쉽게 무너진다. 영화는 동요하는 개인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여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공동체의 운명을 보여준다.



◆ 선악의 경계, 그리고 희망

석우의 문 닫기가 자신에게 돌아갔듯이, “이 새끼 감염됐어, 좀 있다 변할 거야”라는 용석의 말도 자신에게 돌아간다. 잠복기가 몇 초에 불과하던 감염이 용석에게만은 유난히 긴 잠복기를 허용한 탓에, 자신이 감염된 줄도 몰랐던 용석은 어린아이 같은 말을 내뱉는다. 시종 가장 악인처럼 굴던 그가 보이는 유약한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하기야 그는 사태에 책임을 진 자도 아니고, 권력을 지닌 자도 아니었다. 다만 남들보다 더 비겁하고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는 생존방식에 최적화된 인물일 뿐이다.

오히려 미약하나마 사태에 책임을 지닌 사람은 석우였다. 영화는 일반적인 재난 영화와는 다른 선악의 배치를 보여준다. 석우의 이기적이고 무심한 행동이 재난의 원인이었으며, 이기적인 존재였던 그가 재난을 통해 선함을 체득해나간다. 이러한 서사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한다. 재난은 세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엄청난 악인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적당한 이기심과 탐욕을 지닌 소시민인 내가 가담해온 사소한 불의들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존재인 나도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 변할 수 있다!



영화 <부산행>은 이처럼 윤리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아이를 통해 더욱 강하게 암시한다. 영화는 시종 수안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는 끔찍한 재난의 목격자이자, 윤리적 선택의 응시자이다. 그는 “공부 안하면 이 사람처럼 된다”는 용석에게 “우리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래요” 라고 똑바로 말한다. 양보하지 말라는 아버지에게 “할머니 생각이 났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두고 혼자 빠져나가려는 아빠를 만류한다. 그는 아이라는 한계 때문에 재난의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상황을 눈에 담아 기억하며 끝내 살아남는다. 그는 올바른 윤리를 가르쳐준 엄마의 품에 안기거나, 성경(정유미)과 유사가족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바르게 자랄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노랫가락 하나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영화의 엔딩은 숭고함이 느껴진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안녕, 잘 가 등 무수한 뜻을 지닌 ‘알로하’라는 인사말처럼, 두 명의 어린 수안에겐 다양한 날들이 펼쳐질 것이다. 선한 아버지들의 희생으로 지켜낸 희망의 씨앗이 그들로 인해 움틀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부산행>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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