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스’,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함부로 먹지 말 것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SBS 월화드라마 <닥터스>의 첫 장면은 깊은 밤 소란스러운 국일병원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이와 함께 국일병원에 새로 들어온 신경외과 펠로우 유혜정(박신혜)의 독백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죽음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죽음은 어느 곳에서나 놀랄 일이 되어야 한다. 이곳에서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죽음에 놀라지 않는다.” (유혜정)

곧이어 국일병원에 한 무리의 덩치 좋은 검은 양복들이 닥쳐든다. 이들의 보스가 큰 부상을 입어서다. 하지만 건달들은 의사들 앞에서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그마한 몸집의 신경외과 펠로우 유혜정이 이때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그녀는 체대 나온 남자들도 10:1로 싸워 이기기 힘든 건달들을 의대 나온 여자의 몸으로 가뿐히 제압한다. 그리고 건달들의 보스가 쇼크 상태에 이르자 건달들을 내쫓고, 다른 의사들을 향해, 혹은 카메라를 향해, 아니면 시청자들을 향해 말한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유혜정)

<닥터스>는 첫 장면부터 이 드라마가 현실적인 메디컬드라마가 아닌 판타지 메디컬드라마라는 걸 대놓고 드러내는 셈이다. 현실적으로 유혜정이 그 많은 건달들을 처치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의사 가운을 입은 자그마한 여의사가 그 시커먼 양복의 건달들을 쫓아내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지만 <닥터스>란 드라마의 시작에서 상징적인 역할은 한다. 이 드라마는 아마도 역경과 맞서 싸워가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일 거라는 것. 혹은 하얀 가운의 의사가 검은 양복의 건달을 쫓아내는 것처럼 어쩌면 어두운 기운을 쫓아내는 순백의 따스한 이야기로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암시.



<닥터스>는 첫 장면 이후 곧바로 보스의 수술 장면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리고 제법 긴 인서트라 할 수 있는 유혜정의 고교시절 장면이 3회까지 펼쳐진다. 이 회상장면의 이야기들은 메디컬드라마라기보다 잘 만들어진 학원물 단막극과 흡사하다. 한 지방도시의 여고에 전학 온 문제아 고등학생. 아버지와 새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 문제아는 친할머니 강말순(김영애)의 보살핌으로 차츰차츰 마음을 연다.

그리고 동네 음반가게에서 만난 오지랖 넓은 아저씨인 줄 알았던 홍지홍(김래원)과 담임교사와 제자로 만나면서 로맨스의 기류가 싹튼다. 그리고 어느 날 쓰러진 임산부에게 응급조치를 취하는 전직 의사 홍지홍을 보고 유혜정은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키운다. 막 나가는 인간에서 병든 인간을 구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인생으로 터닝포인트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첫 장면과 본격적인 이야기 사이에 낀 인서트 같은 회상 장면은 단순히 여주인공의 과거 설명 역할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닥터스>의 성격을 알려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혜정의 친할머니 강말순은 국밥집 주인이지만 실은 백발의 화타에 가깝다. 그녀는 손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사랑의 약손으로 녹이듯 살살 녹여낸다. 그리고 <닥터스>가 보여주려는 의사의 얼굴은 실은 강말순의 얼굴과 비슷하다. 인간적이고 환자를 이해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런 의사.



사실 <닥터스> 속 의사들은 잘 만들어진 의학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피곤에 절고, 권력다툼에 절고, 툭하면 소리 지르는 의사들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들은 대개 귀엽고, 사랑스럽다. 악역인 진서우(이성경)마저 때론 깜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심지어 젊은 의사들만이 아니라 그간 드라마에서 얄궂고 지질한 권력자 악역을 도맡았던 배우 장현성마저 편법을 모르는 백의의 천사 같은 국일병원 부원장으로 등장해 완벽한 신분세탁에 성공한다.

<닥터스>는 비록 그런 의사들의 모습이 다소 비현실적일지언정 끝까지 밀어붙이는 패기를 보인다. 사실 시청자들 누구나 대부분의 메디컬드라마가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남녀들의 병원놀이 로맨틱드라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닥터스>는 과감하게 살벌한 메디컬 리얼리즘 대신 로맨틱한 메디컬 휴머니즘을 선택한다.

특히 여주인공 유혜정은 이런 이야기를 끌고 가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많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여주인공이지만 나약하거나 애써 귀여운 척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주관이 뚜렷하고 누구에게도 쉽게 기대지 않는다. 사랑의 선택 또한 남자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마음의 확신을 통해 결정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닥터스>의 이야기를 끌고 가기에 꽤 믿음직한 주인공이다. 특히 수술 중 의료사고로 죽은 할머니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인간의 죽음에 놀라지 않는 냉혹한 의사인 국일병원장 진명훈(엄효섭)의 실체를 파헤치는 혜정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중요한 열쇠다.



다만 혜정의 고교시절 이후 드라마의 중심이 국일병원으로 바뀌면서 드라마는 많은 허점을 드러낸다. 특히 <닥터스>는 수술 장면을 위해 너무 쉽게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우를 범한다. 물론 메디컬드라마의 특성 상 수많은 환자들이 등장해야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거기에는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메디컬드라마 특유의 미묘한 센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닥터스>의 환자들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수술 장면을 위한 제물처럼 나타나서 픽하고 쓰러진다. 그럴 때마다 이 휴머니즘 드라마에서 뜬금없이 B급 좀비물의 풍미가 솔솔 배어나온다.

서우와 마음의 교감을 나눈 환자인 오영미(정경순)의 죽음 또한 이 드라마에서 가장 황당하고 어이없는 장면 중 하나다. 병실침대에 앉아 서우가 준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분노하던 그녀는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 사망한다.



서브웨이 샌드위치 먹다가 발작 일으켜 죽은 사건 이후로도 <닥터스>는 과도하고 어색한 PPL 때문에 장점들이 쉽게 묻히기도 했다. 뜬금없이 혜정의 머리에 친구 천순희(문지인)가 “노화의 척도는 머리카락” 운운하며 PPL 헤어에센스를 발라주는 장면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물론 드라마에서 PPL을 배제하기는 힘들다. PPL은 드라마 제작자의 제작비 시름의 주름을 펴주는 필러 역할을 톡톡히 할 테니 말이다. 허나 <닥터스>는 드라마 내의 의사들이 보여주는 말끔한 수술 솜씨와는 달리 PPL을 드러내는 방식 또한 유달리 거칠다. 더구나 어설픈 PPL은 주제의식이나 인물들은 흥미롭지만 메디컬드라마로는 종종 아쉬운 <닥터스>를 순식간에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러니 샌드위치를 너무 함부로 먹지 말 것.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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