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가장 근본적 이유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공세가 심하다. 이들의 주장은 <인천상륙작전>이 굉장한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 평점 테러를 가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평론가들이 합심한 듯 하나같이 혹평을 하였으며, 관객들의 평점은 높은 편인데다, 영화가 상당히 흥행하고 있음을 들고 있다.

그러나 평론가들의 평점이 고르게 나쁜 것은 영화가 졸작일 경우 피할 수 없는 일이며, 관객의 평점과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평론가의 평점과 관객의 평점이 일치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그렇기에 따로 명기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평론가들이 평점 테러를 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며 어설픈 계보학을 펼친다.

하지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인천상륙작전>은 명작은커녕 평작도 되지 못한 졸작이다. 그렇다면 왜 관객이 많이 들었냐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의 작품성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다. 흥행에는 많은 요소가 개입하며, 작품성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가령 영화에 30억을 투자한 KBS가 적극적인 홍보에 나선 것이 영화의 흥행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만약 흥행성이 곧 작품성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평론이나 영화상 등은 전혀 있을 필요가 없다. 박스오피스 순위가 모든 것을 대신 할테니 말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가장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드라마 <3840 유격대>의 극장판이다. 기억을 돕기 위해 부연을 하자면, 1982년도에 MBC TV에서 미국 드라마 <게리슨 유격대>를 방영하였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연합군 유격대원들이 독일군으로 위장하여 첩보 작전을 벌이는 내용이었다. 엘리트 장교가 금고털이나 사기꾼 등으로 구성된 대원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금고 문을 따거나 거짓말을 하여 독일군 부대의 기밀을 빼오거나 교량을 폭파하는 등의 작전을 수행했다. 캐릭터들의 개성도 뛰어났고, 매회 해결되는 사건의 규모나 긴장감도 적당해서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러자 이듬해 MBC는 <게리슨 유격대>를 본 뜬 드라마 <3840 유격대>를 제작하여 방송하였다. 김희라를 대장으로 한 소수의 유객대원들이 황해도 구월산을 배경으로 인민군과 싸우는 내용이었다. ‘반공드라마’를 타이틀로 건 이 드라마에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인민군의 행태와 유격대원들의 용감한 활약이 매회 그려졌다.

<인천상륙작전>을 보자마자 이들 드라마가 떠오른 것은 영화와 두 가지 측면에서 유사점을 갖기 때문이다. 첫째는 장르의 유사성이다. 이들 작품들은 전쟁물을 표방하지만 대규모 전면전을 그리는 대신 소수의 부대원으로 구성된 첩보전을 담는다. 둘째는 적군을 다루는 방식이다. <게리슨 유격대>가 독일군을 다루는 방식은 <3840 유격대>와 <인천상륙작전>이 인민군을 다루는 방식과 완전히 같다. 즉 이들을 오로지 외적으로 대한다.



◆ 첩보전의 허술함을 가학적 스펙터클로 때우다

첫 번째 장르의 유사성에 대해 짚어 보자. <인천상륙작전>은 170억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영화라고는 하지만, 전쟁영화로서의 스펙터클은 후반부에만 조금 등장할 뿐 전반부는 첩보물에 가깝다. <게리슨 유격대>나 <3840 유격대>가 제작비 등 여건의 한계 때문에 취했을 것으로 보이는 길을 170억이나 제작비를 들인 <인천상륙작전>이 동일하게 취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X-레이 작전’이나 ‘켈로 부대’ 실화가 존재했던 만큼, 이를 담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첩보물이든 전쟁물이든 영화에 두 가지 이상의 장르가 섞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첩보물로도 전쟁물로도 영화가 제 몫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첩보물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정보이다. 첩보전의 목적이 상대를 속여서 더 많은 정보를 빼내는 것이다. 영화는 남한군인 장학수(이정재)가 평양에서 파견된 진짜 박남철(박성웅)을 죽이고 그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인천을 점령한 림계진(이범수)의 부대에 침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장학수가 어떻게 림계진의 신뢰를 얻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빼내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학수는 림계진의 신뢰를 얻기 전부터 우격다짐으로 기뢰 매설도를 빼내려고 한다.

당연히 의심을 살 수 밖에 없다. 림계진은 처음부터 장학수를 의심하여 여러 번 떠본다. 하지만 정작 의심하는 자라면 마땅히 할 것 같은 구체적인 행위는 하지 않는다. 가령 장학수 일행들이 정말 의심스러웠다면, 림계진은 마땅히 그들을 모두 떼어놓고 한 사람씩 밀착감시를 했었어야 옳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한 곳에 모아 둔 채 작전을 짜고 미군과 계속 타전을 하도록 놓아둔다.



그는 한채선(진세연)에 대해서도 동일한 허술함을 보인다. 그의 삼촌이 미군의 첩자였음이 밝혀진 이상, 한채선에게는 밀착 감시가 붙었어야 한다. 그러나 림계진은 예전보다 그를 더 신뢰하는 듯 행동한다. 요컨대 림계진은 첩보전의 상대치고는 너무 허술한 존재이고, 상황은 전혀 정교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림계진이 장학수의 대한 의심을 철회하는 계기는 평양에서 알려준 박남철의 신체적 특징을 장학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장학수의 몸에 어떻게 똑같은 흉터가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속임과 의심과 탄로의 과정이 탄탄하게 맞물려야 하는 첩보물에서 결정적인 매듭들이 이토록 맥없이 다루어지다니 기이할 정도이다.

영화는 빈 구멍이 숭숭 나 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기 않은 채, 곧바로 총격전으로 나아간다. 서스펜스는 대충 마무리하고, 큰 화력으로 펑펑 터뜨리며 다음 국면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그리고 그런 액션 장면엔 쓸데없이 자극적인 장면이 삽입된다. 가령 술집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림계진이 여급을 총알받이로 쓰고 그 여성의 미끈한 몸통에 총알이 박히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여성의 신체가 학대당하는 장면을 스펙터클로 사용함으로써 자극의 강도가 높아진다.

장학수 일행이 한채선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다짜고짜 한채선을 묶는다. 자신의 삼촌이 인민군의 첩자노릇을 하고 있다며 경악하고 있는 한채선에게 빨리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일 것 같지만, 그들은 그리 하지 않는다. 장학수가 한채선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 시퀀스가 다 지나도록 지연된다. 그 사이 진세연에 대한 가학과 피학의 장면들이 자극의 강도를 올린다.

첩보물을 표방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치밀한 긴장감을 구성하지 못하는 것은 만듦새의 큰 흠결이다. 그렇다고 후반부 전쟁 장면이 굉장한 스펙터클을 지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후반부 전투 장면이 <태극기 휘날리며>와 비교해서 더 박진감이나 사실감이 넘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장르적인 만듦새가 떨어진다는 것은 지엽말단적인 지적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 한국전쟁에 대한 일면적인 관점

<인천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은 그냥 외적이다. 그러니까 <게리슨 유격대>에서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군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이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침공해왔다”는 자막을 깔고 시작한다. 북한과 남한은 완전히 다른 나라이고 아무 관련이 없는 그냥 옆 나라인데,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남한을 어느 날 북한이 느닷없이 침공했다는 식의 기술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성격이 과연 그런 것일까.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겨우 5년이고, 같은 조선인으로 역사와 문화와 혈통을 공유한 채 살고 있던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해방정국에서 어떤 정부가 세워져야 하는지 계속 논란이 있었고, 신탁통치 찬반을 비롯하여 강대국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지 갑론을박이 있었다. 김구의 평양방문이나 제주 4.3 사건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단독정부의 수립에 의한 영구분단을 반대하는 여론도 상당히 높았다. 요컨대 한국전쟁 직전의 한반도에서 완전히 다르고 완전히 독립되고 완전히 안정화된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한국전쟁은 해방과 군정, 분단과 남북한 정부수립이라는 역사적 격변의 맥락에서 보아야 할 사건이며, 크게 보아 2차 세계대전 직후 냉전의 시작이라는 국제정세와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사건이다. 즉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칭해지는 내전의 성격을 띠는데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서진영의 대립을 대리전 형식으로 치른 국제전의 성격을 띤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자 할 때, 이러한 전쟁의 특성을 도외시한 채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의 대립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인민군과 국방군의 대립으로 묘사하는 것은 큰 패착을 낳는다. 가령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를 찍으면서 스페인 내전의 특수한 성격을 파악하지 않은 채,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에 대한 묘사를 그대로 가져와 대입시킨다면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의 성격을 지극히 일면적으로 파악한 상태에서 만든 <인천상륙작전>이 잘 만든 영화가 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보면 놀라 자빠질 역사 왜곡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파악하는 한국전쟁의 성격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3840 유격대>를 비롯하여 1980년대 말까지 무수히 만들어졌던 텍스트들이 그러하듯이, 영화는 철저하게 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서 한국전쟁을 그린다. 인민군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에서 인민군은 혈육의 정을 무참히 짓밟는 자들이며, 기독교를 ‘이스라엘 토착신’이라 말하며 종교를 탄압하는 자들이다. 영화는 혈육의 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또 이 땅의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반공을 외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담는다. 즉 휴머니스트와 기독교도를 반공의 진영으로 불러들이는 효과를 노린다. 노골적인 선동이긴 하지만 완전히 거짓은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 묘사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심한 것은 따로 있다.

영화는 반공주의에 민족주의를 엎어치는 왜곡을 시전한다. 영화는 인민군의 배후에 소련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림계진은 계속 모스크바 유학시절을 이야기 한다. 림계진과 장학수가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장면까지 넣어가며, 영화는 마치 인민군 엘리트 장교들이 대부분 소련 유학파 출신이거나 소련에 사대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들인 것처럼 묘사한다. 이것은 첫 자막이 명시하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의 기술과 함께 북한 정권과 인민군의 성격을 사대주의적인 것으로 못 박는 효과를 지닌다.

그에 대비하여 미군과 연합 작전을 벌이는 남한의 군인들은 독립운동가들의 적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들이 큰 태극기가 걸려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에 숨어들어 작전을 모의할 때, 이 화면은 이들이 지금 인민군에 맞서 작전을 벌이는 것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군에 맞서 비밀 작전을 펼치던 독립군의 활동과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인민군과 북한 정권의 주체는 친소 사대주의자들이고, 국방군과 남한 정권의 주체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예라는 주장을 영화의 장면을 통해 끼워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물론 국방군이나 남한 정권의 주체 중에 독립운동과 연결점이 갖는 사람들이 소수 존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수립과정에서 친일파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군대를 비롯하여 남한정권의 요직에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총참모장 채병덕, 제 1사단장 백선엽을 비롯하여 사단장급의 대다수가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북한군의 경우 사단장급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항일무장 투쟁을 하였거나 소련군이나 중국군에 속한 채 일본군과 전쟁을 벌인 사람들이다.

남북한 정권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친일청산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남한정권이 떳떳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감하게 남한군을 독립운동가들의 적통을 잇는 세력으로 놓고, 북한군을 친소 사대주의자로 놓는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마술이 벌어진다. 반공주의가 곧 민족주의로 둔갑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맥아더로 대표되는 미군과 남한군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대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



◆ 반공주의라는 좀비

영화가 바라보는 미군과 남한군의 관계는 사대주의니 외세니 주종관계니 하는 불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맥아더의 고뇌’로 표상되는 지극히 순수한 것이다. 이를테면 반공주의라는 거대한 이념을 공유한 상태에서, 느끼는 뜨거운 전우애와 숭고한 감동 같은 것이다. 영화에서 맥아더는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전쟁영웅으로서 어떤 실질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워싱턴에서 대통령의 뜻을 전하러 온 미국방부장관과 설전을 벌이거나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고독한 목소리로 자신의 철학을 나지막이 들려줄 뿐이다.

그의 철학은 한마디로 반공주의이다. 그는 백악관에서 우려하는 중공군의 참전 등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깟 국지전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그러니까 그는 핵전쟁을 포함한 전면전을 해서라도 공산주의자를 멸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자신의 출세는 물론이고, 남북한 주민의 생명이나,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정세판단 등도 그의 깊고도 넓은 반공주의의 고뇌를 이길 수 없다.



영화는 그의 반공주의에 의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한국전쟁 초반 상황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후 전쟁은 3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맥아더의 오판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불러왔고, 후방 수송로의 차단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탓이다. 그나마 맥아더의 해임으로 더 큰 확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다. 그런 와중에 그의 미친 반공주의를 오늘날 거룩하게 기리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사실 반공주의는 그 자체로 이념이 되기에 불충분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안티테제로만 존재할 뿐 무엇을 지향한다는 내용을 담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그때그때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전용되며 위세를 떨쳐왔다. 이승만 정권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고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쿠테타로 출범한 박정희 정권 역시 자신의 친일과 남로당 전력을 가리기 위해 반공을 제1국시로 내세웠고,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적극 활용하였다. 그러나 1986년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닌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유성환 의원의 국회발언과 1987년 민주화 항쟁과 1989년 동구권 몰락 등을 거치면서 반공주의는 담론의 차원에서 힘을 잃었다. 오직 국가보안법의 형태로 잔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1950년대의 생생한 반공주의와 그것을 육성으로 들려주는 맥아더를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로지 그 목소리를 원어민 발음으로 듣기 위해 거액에 리암 리슨을 섭외하고, 인천시와 KBS와 자유경제원 등이 홍보에 발 벗고 나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의 무속신앙에서 맥아더가 관우에 버금가는 외래 몸주인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는 대단히 주술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21세기 한국에서는 반공주의의 화신 맥아더와 박정희와 이승만에 대한 제사가 한창이다. <검은 사제들><무수단><곡성><부산행><서울역> 등 근래 극장가에서 유난히 주술과 좀비에 대한 영화가 봇물을 이루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고 싶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인가 통일인가. 2016년이 30년 전에 비해 얼마나 앞서있는지 아니면 후퇴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인턴상륙작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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