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조선 왕실을 그리는 기이한 이중플레이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진 실존인물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로, 4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중이다. 역사적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는 호의적인 감상이 주를 이룬 가운데, 역사왜곡이 심하다거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라는 쓴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하지만 홍보사는 광복절을 기점으로 더욱 ‘민족의 아픔’이니 ‘망국의 한’ 을 내세우고 있으며, 흥행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물론 <덕혜옹주>의 흥행에는 이런 논란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존재한다. 일단 손예진의 연기와 매력이 출중한데다, 허진호 감독의 ‘적어도 기본은 하는’ 연출력이 영화의 만듦새를 깔끔하게 뽑아냈기 때문이다. 역사 문제 등을 떼어 놓고 영화를 본다면, 그러니까 덕혜옹주가 완전히 가상의 인물이라고 가정하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는 상당히 재미있다. 하지만 가상의 인물이라면 역사적 슬픔을 운운하는 감상도 따라붙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영화는 기이한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 보자면 전혀 맞지 않는 허구를 마치 사실인양 풀어 놓으면서, 역사적 아픔을 운운한다. 물론 역사를 소재로 한 극영화가 반드시 사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극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허구적 상상을 가미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실존인물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전혀 하지 않은 행위를 바탕으로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끌어내려 하는 것은 곤란하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이처럼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떤 욕망 때문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덕혜옹주>가 기대고 있는 욕망은 ‘국뽕(애국심)’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실체가 불분명하고 해괴한 욕망이다.



◆ 실존인물과 무관한 허구적인 이야기

영화 <덕혜옹주> 속 인물과 실존인물 덕혜옹주는 몇몇 생애사를 공유할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즉 1912년에 환갑이 넘은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1919년에 고종이 사망했고, 1925년에 강제로 일본유학을 떠났다. 1929년에 어머니 양귀인이 사망했으며, 1931년에 대마도 번주 집안의 귀족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으로 입국이 불허되었다. 1955년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이혼을 당하였고, 1956년에 결혼한 딸이 자살했다. 1962년에 극심한 정신질환 상태로 한국에 돌아왔고, 1989년에 창덕궁에서 사망했다는 확인된 사실만 공유한다.

이상의 일대기에서 적극성이나 긍정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영화는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수사까지 동원하며 덕혜옹주를 매우 능동적이며 당대를 고민하고 저항했던 인물로 그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영화가 그리는 덕혜옹주의 긍정적인 면모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는 의도적인 왜곡이 들어있다.

영화는 덕혜옹주가 일본 옷을 입기를 거부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일본인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매일 게다와 하오리 차림으로 통학하였다. 영화에는 덕혜옹주가 우리말 동요를 지어 조선의 아이들이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소학교 시절에 동시를 잘 지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어 동시였다. 여기에 일본의 유명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조선과 일본에 보급하였다. 이는 일본과 조선 민중들에게 조선왕실을 친근하게 여기게 하려는 사이토 총독의 특별한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덕혜옹주가 저항적인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를 가졌다든지, 한글학교를 세웠다거나,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는 것도 모두 허구이다. 덕혜옹주는 국내에 있을 때도 일본인 보모와 일본인 가정교사와 일본인 교사에 둘러싸여 자랐다. 일본에서 그가 다닌 학교는 일본의 황족과 귀족 집안의 자녀만 다니는 학습원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왕족으로 특별대우를 받았다. 일본에서 머물 당시 이복오빠인 영친왕 부부와 한집에서 살았다. 반일정서에 노출된 일도 없으며, 바깥 세계를 만날 일도 없었다.

영화는 조선민중들이 덕혜옹주를 극진하게 모셨으며, 일본의 유학생이나 임시정부의 인사들까지 덕혜옹주에 대한 존경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듯 그린다. 하지만 당시 조선민중들 사이에서는 망국의 책임이 있는 조선황실이 일제로부터 막대한 세비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것에 대한 냉소와 반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더욱이 조선인 유학생들 중에는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이들이 많았다. 일본 유학생들이 덕혜옹주를 만날 일도 없었지만, 설사 만났다 하더라도 그토록 호의적일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영화는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의 망명기도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이 과정에서 덕혜옹주가 주도적으로 설득한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영친왕이나 덕혜옹주는 망명을 기도한 적이 없으며, 독립운동과 관련된 어떠한 행위도 한 적이 없다. 영화에서 덕혜옹주가 1945년에 조선 입국이 거부되었다는 현실과, 악랄한 친일파였던 한택수가 오히려 호의적으로 대접받는 것에 극한 분노를 느껴 광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장면이 주는 효과는 명확하다. 덕혜옹주의 시선을 해방 후 친일파의 득세에 기막혀하는 조선민중들의 시선에 겹쳐놓음으로써, 그의 고난과 슬픔이 마치 조선민중의 것과 같다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해방직전까지 누린 삶은 일제에 순응한 안온한 삶이었고, 그의 정신분열증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30년에 발병한 것이었다.



◆ 경술국치 후 조선황실의 위상

영화의 포스터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것은 1912년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이다. 이미 망한 나라에서 태어난 그가 옹주라고 불리며 특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왜일까.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경술국치 당시 일본과 맺은 한일병합조약 8개 조문에는 조선황실과 왕족에 대한 지위보장이 담겨 있다 .제3조가 “황제, 황태자, 후비, 후예에게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이고 제4조가 그 밖의 황족과 후예에 대한 신분보장과 자금공급에 관한 내용이며, 제5조가 공이 있는 자에게 훈장과 작위를 수여하고 은급을 준다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고종은 한일병합의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신하들을 나무라지만, 한일병합으로 인해 ‘이태왕(상왕)’의 지위를 보전 받은 채 막대한 세비를 받으며 궁궐에서 살고 있는 고종이 할 소리는 아니다.

합방 후 일제는 조선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부르며 왕족 대우를 해주었으며, 천황가 다음으로 많은 세비를 주었다. 물론 이는 경술국치가 일제의 강압이 아니라, 조선황실이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평화롭게 이루어진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조치였다. 자발이냐 강제이냐 하는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 논란이 된다.



◆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망명이라니?

영화는 1919년을 비추며 시작된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맞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었고, 이듬해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많은 이들이 기대를 품었다. 1907년에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였다가 강제양위를 당했던 고종은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를 보내려 하였다. 한일합방에 동의한 적이 없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한편 일제는 고종의 막내아들 영친왕과 일본 황족인 이방자의 결혼을 밀어붙여, 이들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냄으로써 경술국치가 평화롭게 이루어진 합방이었음을 알리려고 계획하였다.

영친왕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고종이 사망했다. 국상으로 영친왕의 결혼이 무산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민중들 사이에 독살설이 퍼지는 역풍을 맞았다. 인산일을 앞두고 모여든 인파가 분노로 들끓으면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4월에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9월에는 강우규가 신임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벌였다. 11월에는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이 상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해 변장을 한 채 압록강을 건넜다가 국경도시 단동에서 붙잡혀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격변기에도 영친왕은 안온한 삶을 이어갔다. 그는 고종의 탈상도 마치지 않은 이듬해에 이방자와 호화결혼식을 올렸다. 조선민중들은 분노했으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영친왕을 “원수의 여인을 아내로 맞은 금수”라며 성토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런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망명하려다 실패한 인물로 그리다니, 얼마나 황당한 묘사인지 알 수 있다.

영화 속 사건은 앞서 언급한 1919년의 의친왕 망명기도 사건과, 1927년에 있었던 영친왕 납치기도 사건을 버무린 것이다. 순종의 사망으로 이왕(李王)에 오른 영친왕은 1927년에 일본 백작의 신분으로 위장해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임시정부는 첫 경유지인 상해에서 영친왕을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밀정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조선민중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유람이나 다니는 그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군함에서 1박을 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영친왕 내외는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각국의 황실로부터 훈장을 받는 등 호사스러운 여행을 이어갔다.

영친왕에게 민족의식 따위는 없었다. 자신을 일본 황족과 동일시하며 살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 장관에게 “내 지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쪼록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해줄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 독립 운동하는 구왕실이라는 정신승리

영화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을 사실과 다르게 그려나간다. 영화에서 덕혜옹주는 영친왕에게 망명을 설득하며, 조선 왕실이 조선의 독립에 기여하지 않으면, 독립을 맞은 후 조선민중들 앞에 나설 수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같은 장면에서 대표적인 친일파 이건 왕자는 “임시정부는 뭐. 거기에 가봐야 여기만큼 우리를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실제 조선 왕실의 입장이었다. 요컨대 실제로 조선 왕실이 독립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왕실은 조선 민중들의 머리에서 지워졌으며, 해방 후에도 그들을 의미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는 조선의 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조선 왕실을 미화하여, 독립운동과 모종의 끈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듯이 그린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역사의 빈 구멍을 허구로라도 만들어서 메우고자 하는 욕망은 기이하고 변태적이다. 한말에 민중의 수탈자로 악명 높았던 명성황후를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말 한마디로 민족의 아이콘으로 삼거나, 어쨌거나 망국의 책임을 지닌 자로 조선 민중의 삶보다 왕실의 보존에 관심이 컸던 고종을 단지 이완용에게 속은 피해자로 그리거나, 일제에 맞서다 독살을 당했다는 풍설을 기정사실화하거나, 심지어 그를 개혁군주로 띄우려는 갖가지 시도도 모두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조선왕실의 실상을 들여다볼수록 자괴감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의 인물들 중에도 조선의 독립과 근대국가를 세우는데 활약한 인물이 존재했다고 믿고 싶은 욕망은 이우 왕자를 불러내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일본에 저항했다는 행위 중 확인된 것은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가 일본군 장교로 중국에 머물던 시기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설이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주장되곤 한다.

<덕혜옹주>는 왕실미화의 종합선물세트이다. 고종은 한일병합에 찬성하지 않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신하들이 저지른 일이며, 끝까지 밀사를 파견하는 등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우 왕자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며, 의친왕은 벌써 상해에 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정신질환자로 살았던 덕혜옹주는 조선의 왕족으로 사명감을 자각한 선각자로 그려지며, 최악의 반동적인 인물이라 할 만한 영친왕도 그저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조선 왕실은 그저 어쩔 수가 없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선민중들과 마찬가지로 망국의 고통을 함께 겪었다는 누군가의 주장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 ‘입헌 옹주국’ 시대의 역상?

그런데 이렇게까지 조선 왕실을 미화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분명히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이지, 대한제국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단절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왕실을 미화하는 것이 곧바로 ‘국뽕(애국심 고취)’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조선 왕실이 지금의 대한민국 체제와 대단한 연결점을 지니며, 당시의 신분질서가 역사적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듯 그린다. 영화 속 덕혜옹주가 한국의 입국장에 들어설 때, 구한말의 궁인들이 상궁 옷을 차려입고 절을 하는 모습은 대단히 기이하지만, 영화는 이를 마치 감동적이라는 듯 그린다. 영화는 전제왕정과 민주공화국 사이의 경계를 뭉개며 역사적, 정치적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안간힘을 쓴다.

알다시피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공화정을 채택한 정부로, 구왕실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임시헌법에는 ‘구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항을 두었는데, 이는 1919년만 해도 구왕실과 연계점을 갖는 것이 민중들의 지지를 모으는데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에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민주공화정을 추구하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화정은 훨씬 이전인 독립협회의 진보진영이나 신민회, 대한광복회 등에서 주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이르러 공화정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죽음이라는 공백 덕분이었다. 왕의 목을 친 적은 없지만, 왕이 자연사함으로써 조선민중들은 고종을 애도하는 방식을 통해 구왕실에 대한 애증과 구체제에 대한 미련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수립이후 구왕실의 상징성은 갈수록 힘을 잃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의 꼭두각시 역할에 충실하였던 구왕실은 해방 후 조선민중들에게 복원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결과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은 불허되었고, 왕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왕실복원이나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당연하고도 냉엄한 귀결이다. 하지만 영화는 덕혜옹주의 회한을 담으며, 기묘한 눈속임을 감행한다. “나는 조선의 희망이 되지 못했어요.” 누가 아니라나. 하지만 그에 대한 영화 속 답변 “아니오. 저에게 옹주님은....” 옹주를 평생 사모한 사람의 입을 빌린 개인적인 평가가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임에도 영화의 눈속임은 자연스럽다.

임시정부 수립에서 한번, 해방 후에 또 한 번, 이렇게 확인사살된 구 왕실을 영화는 다시 불러들인다. 이유가 뭘까. 그것은 현재의 공화국의 위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공화정, 3.1 운동의 저항성과 4.19 혁명의 민주주의 이념 등이 모조리 흔들리고 있으며, 세습 신분제가 부활하고 심지어 ‘입헌 옹주국’이라는 농담이 횡횡하고 있지 않은가. 이 와중에 자신이 뛰어놀던 궁에 다시 돌아온 옹주, 그러나 멍한 상태가 되어 웅얼거리는 옹주의 회한이라니!

영화는 있는 그대로의 옹주를 그리면 실망할까봐 공동체적인 욕망을 잔뜩 투사하여 예쁘고 바람직한 가짜 옹주를 만든다. 그 이미지에 위안을 삼으며, ‘어떤 추악한 옹주의 시대’를 견뎌내려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소녀에게 왕자는 필요 없듯이, 민주시민에게 옹주는 필요 없다고 외치지 못하고) 선한 가짜 옹주를 통해 악한 진짜 옹주를 환상적으로 대리하겠다는 그 욕망이 너무나 고답적이고, 너무나 퇴행적이고 너무 반동적이어서 깜짝 놀랄 지경이다. 왕의 목을 치지 않았기 때문에, 자꾸만 되살아나는 왕을 보는 느낌이다. 하기야 현실에서도 현직 대통령의 언어와 태도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선왕의 제사를 지내고, 초월적 관점에서 문무백관들을 꾸짖는 전제왕정의 왕을 연상시킨다. 민주공화국에서 가장 반 헌법적이고 가장 체제부정적인 세력은 좌파가 아니라, 파시스트와 왕정복고세력이다.



◆ <덕혜옹주>는 왜 <엘리자벳>이 되지 못했을까.

덕혜옹주의 삶이 슬픈 이유는 일제에 의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선전용 이미지로 소비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덕혜옹주는 죽어서도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가 덧씌운 ‘바람직한’ 이미지에 의해 기림을 받는다.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만약 허진호 감독이 덕혜옹주에게 독립운동이니 망명이니 하는 허구의 이미지를 덧씌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덕혜옹주의 삶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허진호 감독의 전공을 살려서, 마지막 황녀라고는 하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며 비운에 찬 쓸쓸한 삶을 살았던 어떤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냈더라면 어땠을까.

뮤지컬 <엘리자벳>을 본 사람이라면, 그런 식으로 만들어도 얼마든지 작품이 되며, 어쩌면 굉장히 성숙한 시선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엘리자벳>은 격동기를 살았던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녀의 일대기를 그리지만, 그를 헝가리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미화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고, 그저 처연하고 이상한 여성우울증자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뮤지컬에 어울리는 선명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섬세하면서도 모호한 느낌들을 입체적으로 살려내어 스산한 감동을 안긴다. 이런 느낌이야말로 허진호 감독이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냈을 때, 기대해볼 만한 것이 아니었을까. 소재와 감독, 둘 다 아깝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덕혜옹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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