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감독판이 아닌 확장판 상영이 갖는 의미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얼마 전부터 영화 <아가씨>의 확장판이 몇몇 아트하우스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원래는 서울 아트 시네마의 시네 바캉스 행사에서만 두 번 틀고 곧장 IPTV로 갈 예정이었다는데 계획이 바뀐 것이다.

확장판은 일반판보다 20여분 정도 더 길다. 둘 중 어느 쪽이 좋은가에 대해 묻는다면 답변하기 힘들다. 일반판은 보다 치밀하게 압축되어 있고 스릴러의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확장판은 보다 느긋하며 로맨스에 더 치중한다. 벌어지는 일은 달라지지 않지만 몇 십 분의 장면을 추가하는 것으로 내용의 분위기, 심지어 장르까지 바뀐다.

한 작품에 하나 이상의 버전이 있다면 어느 것이 정본인가? 한동안 이런 것이 상당히 의미 있는 질문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의미 있는 질문치고는 답이 간단했다. ‘감독 판’. 여러 버전의 영화가 존재한다면 최종판에 권위를 실어주는 건 당연히 감독이어야 했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정본은 누가 뭐래도 감독판이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올 때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고 감독의 의도는 시장성, 제작사의 요구, 상영시간, 검열, 등급심사에 의해 왜곡된다. 당연히 ‘순수한 감독의 의도’에 대한 갈증과 요구가 따른다. 감독판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이를 만족시킨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점점 쌓이면서 이 답변의 명쾌함은 점점 빛을 잃어간다. 이제 모두가 감독판의 권위를 말없이 인정하지는 않는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들은 장황한 감독판보다 날렵한 일반판이 낫다. <스타워즈>의 예는 드는 것 자체가 귀찮다. 새로운 판본의 상당수는 감독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엑소시스트>의 새 버전은 감독이 아닌 원작자에 의해 만들어졌고 <마지막 황제>의 새 화면비율은 감독이 아닌 촬영감독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이맥스의 유행으로 여러 화면비율의 영화들이 동시에 개봉되는 일도 잦아진다. 이 때는 어떤 비율이 ‘원본’인가? 무조건 화면 정보가 많은 버전인가?

감독 자신이 하나의 버전에 권위를 몰아주지 않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최근 나온 수많은 확장판들은 감독판이 아니다. 이전의 감독판이 일반판의 예술적 타협을 거부하고 예술가의 목소리를 살려주는 것이었다면 최근의 감독판/확장판은 종종 2차 시장을 노린 또다른 상술처럼 보인다. 상술이라고 해서 결과가 나쁘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정본’에 대한 답은 아니다.



<아가씨>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이 영화의 확장판도 감독판은 아니며, 일반판과 확장판 모두 각자의 가치가 있다. 개인으로 추천한다면 일반판을 먼저 본 관객들에게 확장판을 권한다. 확장판의 편집은 스릴러와 반전의 요소를 약화시키는 구석이 있고 긴 러닝타임은 조금 버겁다. 하지만 이미 이 영화를 보고 팬이 된 관객들에게 이들은 큰 단점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장점이다. 일반판을 보면서 상상으로만 그렸던 수많은 장면들이 진짜로 등장하고 종종 개봉 이후 팬들의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는 것 같다.

처음 의도가 무엇이건 결국 팬서비스인 것이다. <아가씨>의 확장판은 예술가의 ‘완벽한 버전’에 대한 욕구가 아닌 이 영화를 아이돌처럼 따라다니며 좋아하는 팬들의 요구를 먼저 충족시킨다. 하긴 예술가의 에고가 늘 우선순위라는 법은 없다. 어떤 영화들은 고고하게 홀로 서 있는 대신 관객들과 대화를 하며 개봉 이후에도 성장해간다. <아가씨>는 그런 현상의 모범적인 예이고 확장판은 그런 현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오퇴르’(auteur·각본 집필과 연출을 동시에 하면서 자기 소신에 따라 영화를 만드는 감독) 중 한 명인 박찬욱의 영화 세계에서 일어난 건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아가씨>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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