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연인’, 이지은의 얕은 연기만 탓할 순 없겠지만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드라마는 망했지만 KBS <예쁜 남자>에서 아이돌 스타 아이유의 여주인공 김보통 연기는 나름 신선했다. 그녀는 예쁘면서 나쁘기까지 한 남자 독고마테(장근석)를 따라다니는 ‘또라이’ 사생팬의 행동이나 감수성을 꽤 자연스럽고 투명하게 드러낼 줄 알았다. 무엇보다 연기 초짜 아이유에겐 SM 출신 아이돌스타들의 실패한 연기 스타일인 슬픔, 분노, 웃음 삼종세트 인형 같은 뻣뻣함이 없었다.

이후 KBS 주말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의 여주인공 이순신을 거쳐 그녀는 KBS <프로듀사>의 아이돌 신디를 연기하면서 가능성 이상의 것을 보여줬다. <프로듀사>의 신디는 10년 차 아이돌의 차가운 내면과 이제 10대를 겨우 벗어난 20대의 두려움과 떨림을 동시에 지닌 복잡한 캐릭터다. 이 각기 다른 내면이 쉼 없이 하지만 정적으로 오가는 인물을 아이유는 꽤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아마도 아이돌 스타로 긴 시간 세상에 노출되어왔던 그녀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들이 녹아들어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지닌 아이돌 스타들이 모두 신디 같은 섬세한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유의 배우로서의 매력은 그러니까 연기가 아닌 진짜 그 또래가 느끼는 감정들을 투명에 가깝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발랄한 감정만이 아니라 그 바닥에 자갈처럼 깔려 있는 우울이나 허무 냉소까지 전부.



SBS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에서 아이유는 조금 더 욕심을 낸다. 여주인공 해수를 연기하면서 그녀는 아이유가 아닌 배우 이지은이란 이름으로 역할에 임한다. 시대극의 특성 상 이 작품에서 그녀에게 필요한 건 투명한 감정을 드러내는 천재적인 순발력이 아닌 극 안에서 움직이는 캐릭터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철저함이다. 하지만 아이돌 아이유와 배우 이지은이 보여주는 연기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지 아직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문제는 아무리 해수가 현재에서 과거로 온 고하진의 영혼이 스며든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야기 자체는 시대극이라는 사실이다. 핑클 출신의 배우 성유리가 첫 주연작 <천년지애>에서 보여준 “내가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 사극 연기가 아무리 민망했을지언정 드라마 자체를 흔들지는 않았다. 과거에서 현재로 타임슬립한 부여주는 코믹하고 예쁜 모습만 부여주면 끝이었으니까. 하지만 <달의 연인> 해수에겐 좀 더 깊은 연기가 필요하다.

사극은 실존 인물 혹은 가상의 실존 인물을 설득력 있게 그 시대의 특성 안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 인물은 이야기 속에서 붕 뜨고 만다. 그리고 그 사극의 깊음을 보여주기에 아직 배우 이지은이 가진 것들이 너무 얕은 인상이다.



물론 <달의 연인>은 꽃미남 황자들의 거국적인 ‘찌찌파티’로 서막을 여는 가벼운 퓨전사극이다. 허나 원작에 비춰 볼 때 멜로의 비중 또한 높고 왕권 다툼 같은 어두운 이야기도 분명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격에 맞게 4황자 왕소의 이준기나 8황자 왕욱의 강하늘은 자신의 배역에 밀도 있게 녹아든다. 그렇기에 왕소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사극 속 비운의 인물 특유의 암울함이 왕욱의 연기에서는 시대극 멜로물이 지닌 운치 있는 아련함이 돋보인다.

하지만 진지한 장면에 배우 이지은이 등장하면 흐름은 쉽게 깨진다. 이지은의 너무 소란스러운 움직임이나, 분위기에 맞지 않는 대사 처리, 심지어 크크크 웃는 웃음소리 하나에도 시대극의 분위기는 쉽게 무너진다. 오히려 이지은이 등장했을 때 위화감이 없는 건 이 두 황자가 아닌 10황자 왕은(백현)과 함께하는 장면 정도다. 초등학교 학예회의 갑돌이와 갑순이 연기 같은 둘의 조합은 나름 귀여운 면이 없는 건 아니다. 그냥 이 드라마의 쉬어가는 장면 정도로 생각하면 별 부담은 없기 때문이다. 배우 이지은이 시대극에서 부담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의 연기가 딱 그 정도의 얕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 배우 이지은의 얕은 연기 탓에 <달의 연인>이 산만해진 건 아니다. <달의 연인>은 빼어나고 수려한 장면들로 보는 이를 사로잡지만 정작 이야기의 흐름에는 긴장감이 없다. 원작의 특성 상 <달의 연인>은 등장인물이 꽤 많다. 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이야기의 중심도 잡지 못해 <달의 연인>은 그냥 장면과 장면의 나열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가 힘 있게 받쳐주지 못하는 시대극의 경우 MBC <옥중화>에서 옥녀를 연기하는 배우 진세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배우의 얕은 연기는 더욱 쉽게 그 바닥을 들킨다.



그럼에도 <달의 연인>에는 가슴 치는 인상적인 장면이 존재하긴 한다. 바로 남편 왕욱의 등에 업혀 생을 마감하는 해씨부인(박시은)의 처연한 마지막 순간이 담긴 장면이다. 두 사람은 눈길을 걷고 그 뒤를 천천히 여동생 해수가 따라온다.

평생 자신을 지켜주고 존중했지만 자신을 연모하지는 않았던 남편을 둔 여인. 그리고 그 남편이 자신의 사촌동생을 연모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이 연이 되기를 바라는 여인. 해씨부인의 죽음은 이 산만하고 요란한 퓨전사극에서 처음으로 정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 특유의 아름다움은 강하늘과 박시은이 보여주는 안정적이면서도 세련된 연기합에 있다. 배우 이지은은 이 장면 안에서 열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서 있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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