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이 묻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밀정>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 대한 영화이다. 일제강점기와 의열단이라는 키워드에서 영화 <암살>을 연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밀정’이 첩자라는 뜻이므로, <무간도>나 <신세계>같은 언더커버의 존재를 쫓는 첩보스릴러 영화를 연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객에게 <밀정>은 과히 재미있는 영화가 못된다. <밀정>은 <암살>처럼 일제강점기의 사건들을 허구적으로 재배치하여 장르적 재미와 쾌감을 극대화한 영화도 아니고, <무간도>처럼 스릴러의 긴장미가 쫄깃한 영화도 아니다. 밀정의 존재는 처음부터 공개되어 있고, 숨어있던 밀정은 누구여도 별 임팩트가 없다.

그렇다면 <밀정>은 재미없는 영화인가. 그렇지 않다. 애초에 감상 포인트가 전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밀정>은 <암살>보다 실제 사건에 근거를 둔 건조한 재현으로 훨씬 실제 역사에 근접한 재현을 하고 있다. <밀정>은 스파이의 존재를 찾고 감추는 숨바꼭질이 아니라 ‘밀정이자 밀정이 아닌 한 인간’의 흔들리는 내면을 보여주는 심리극에 가깝다. 요컨대 숨바꼭질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며, 술래는 그 자신이다.

◆ 흔들림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밀정>은 변절과 전향을 통해 경계를 넘나들던 인물의 흔들림에 관한 영화이다. 그는 “다음에 만났을 땐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맞다. 매순간 흔들리는 그는 자신조차 어디에 서 있을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이정출(송강호)을 중심에 두고 말하려는 것은 ‘흔들림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지금껏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는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선악의 두 지점으로 그려졌을 뿐, 어떤 계기와 과정을 거쳐 그리 되었는지 말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친일파들에게 면죄부가 돌아갔다. 독립운동가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인간적인 공감이 가지 않으며, 친일파는 나쁘긴 해도 현실적인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변명과 궤변으로,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그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모두가 친일파일 수밖에 없었다는 물타기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먹히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 말은 친일부역행위가 마치 아무런 판단도 필요치 않은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게 만드는 맹점을 지닌다. 과연 그럴까.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특별한 결심이 없으면 그냥 친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이후 삶에는 아무런 결단이나 선택의 순간 없이 그저 평범한 친일파로서의 길에 놓이는 걸까.

<밀정>은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친일경찰이 되고 다시 의열단과 맞닥뜨리면서 선택의 극점에 놓이는 이정출을 통해 지극히 현실논리에 밝은 개인이 어떤 이유로 변절과 전향을 거듭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친일부역행위 역시 끊임없는 선택과 판단의 기로에 서는 일이며, 매순간 어떤 이유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는 계속 문제가 된다. 그가 느끼는 갈등은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느끼는 고민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주는 의미를 지닌다.



◆ 사람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변절과 전향을 단순히 풍자적으로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깊이 파고드는 영화에서 중요한 점은 주인공이 보여주는 변절과 전향이 어떤 논리와 심리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납득시키는 것이다. 가령 <타인의 삶>은 악질 비밀경찰이 왜, 어느 순간에, 무엇을 계기로 전향하게 되었는지 밀도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밀정>은 그것을 납득시킨다. 물론 그 성공의 절반은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의 심리표현에 의한 것이지만, 영화의 시나리오와 플롯도 상당한 기여를 한다.

영화는 이정출의 세 대사로 주제를 함축한다. 첫째는 “너는 조선이 독립할 것 같냐?”이고, 둘째는 “사람은 자신의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이고, 셋째는 “김장옥의 발가락이 참 가볍다고 느꼈다.”이다.

첫째, 조선이 독립할 것 같지 않다. 그는 임시정부에 합류했던 사람이지만, 친구들을 배신하고 변절하여 친일경찰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이 독립할 것 같지 않아서 이다. <암살>의 염석진(이정재)의 배신도 같은 이유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만주사변 이후 변절하였는데, 그것도 같은 이유였다. 일제는 점점 더 강대국이 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독립은 점점 더 가망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이 말을 깊이 들여다보면 지는 쪽을 택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읽힌다. 즉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이유는 삼일운동 이후 높아진 자신감으로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독립과 자신의 자아실현이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일말의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일운동 이후 잔혹한 탄압을 겪고, 문화 통치라는 유화책을 접하게 된 조선인들에게 조선독립의 가능성은 점점 멀게 느껴지고, 일제의 문화통치가 열어준 기회를 통해 자아실현을 꾀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문화통치 시절 조선인이라도 경찰이나 교사로 채용되는 일이 늘었는데, 여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다수 나타났다. 이들도 이정출과 비슷한 고민을 거쳤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처럼 이정출은 자신을 믿어주는 히가시를 위해 친일부역을 한다.



둘째, 사람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을 위해선 목숨을 바칠 수가 없다. 그는 히가시가 자신을 믿는다고 생각했기에 변절했다. 그러나 더 많은 신임을 얻기 위해 하시모토(엄태구)와 충성경쟁을 하는 위치에 놓인다. 더욱 곤란한 것은 하시모토가 단지 경쟁자가 아니라 감시자라는 점이다. 하시모토는 이정출이 알지 못하는 정보와 명령을 받으며, 이정출과는 독립된 작전을 수행한다. 히가시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진다.

반면 정탐을 위해 접촉한 김우진(공유)은 몇 번의 만남 끝에 자기 앞에 떡하니 정채산(이병헌)을 내놓는다. 이정출은 깜짝 놀란다. ‘아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는 허패를 던졌는데, 상대는 진패를 까고, 심지어 목숨과 조직을 통째로 내놓는다. ‘대체 나를 뭘 믿고?’ 정채산은 자신이 믿는 동물적인 직감으로 이정출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도와 달라 요청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이정출은 지극히 혼란스럽지만, 김우진·정채산과 만나 술을 마셨던 마법 같은 그 밤의 오묘한 긴장과 쾌감에 몸과 영혼이 젖었을 것이다.

그의 머리에는 몇 마디 말만 뱅뱅 돌았을 것이다. “이쪽저쪽 기웃거리다 쪽박 찬 사람들 많이 봤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 결정할 때가 온다.” 이 말들은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박힌다. 그는 흔들리는 와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열단을 돕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경성 행 열차에서 하시모토와 대치한 절체절명의 순간, 김우진의 “바로 지금”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총을 쏜다. 결국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의 편에 섰다.



◆ 실존의 가벼움

셋째, 김장옥의 발가락은 가볍다. 그리고 연계순의 시신은 작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에서 이정출의 감정이 가장 고조되는 지점은 연계순과 만나는 순간이다. 히가시는 이정출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연계순의 고문을 명한다. 친일경찰로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이지만, 몸서리 칠만큼 잔혹한 명령에 그의 영혼이 잠시 흔들린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저들의 충성스러운 개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잔인함을 증명하는 일일까.’

그것은 친일경찰로서 충성을 시험하는 일이기도 하고, 인간의 극점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것을 해냄으로써 충성심을 인정받지만, 한편으로 친일경찰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요구받는 일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저 “경찰이 되지 않았으면 폐병쟁이 시인이 되었을 사람”이,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우연히 일본경찰이었기 때문에 친일경찰이 되었다는 흰소리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의 일부가 부서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밀어낸다. 손을 씻어 내듯, 잊어버리려 한다. 김우진에게 폭탄을 건네받아 보관하고 있으면서 재판에 끌려나와 “나는 경찰로서의 첩보임무를 다했을 뿐이요, 승진 시켜준다는 말을 믿었다”는 말로 좌중의 야유를 받을 때도,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아마 몇 가지 마음이 공존했을 것이다. 히가시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억울함, 일단은 무죄함을 주장하여 살고 봐야겠다는 생존본능, 정말로 살아나가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 등등이 그 순간에 스쳤겠지만, 그 이후 정말 무엇을 할 것인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출옥 후 그에게 행동하게 만든 것은 연계순의 시신이다. 자신이 참혹하게 짓이긴 연계옥은 끝내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고, 곡기를 끊은 채 자결했다. 원래 작은 체구였지만, 단식으로 숨진 연계순의 시신은 너무 작았다. 연계순의 시신은 김장옥이 남긴 발가락을 연상시킨다. 친구라며 이야기를 하자던 이정출에게 김장옥은 “쥐와 인간은 함께 살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동안 이정출을 지배한 것은 “조선인은 굴복하거나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히가시의 말이었으나, 그는 이제 쥐가 되거나 사람이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시종 이정출의 선택을 추동한 것이 신념이 아니라 불신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조선독립을 위해 싸웠으나 조선이 독립할 것 같지 않다는 불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바쳐 왔으나 그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불신,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이 뭐 대단히 무거운 이념과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저 김장옥이 남긴 발가락이나 연계순의 시신처럼 작고 가벼운 실존만 남는다는 어떤 깨달음이 그의 눈앞에 툭 떨어진다.



◆ 황옥의 모호함을 메우는 이정출의 판타지

알려져 있듯이, <밀정>은 김상옥 사건, 김시현-황옥 사건 등 당시 실존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이다. 영화 속의 김장옥은 김상옥, 김우진은 김시현, 연계순은 현계옥, 이정출은 황옥을 각각 모델로 삼았다. 1923년 의열단은 제2차 대규모 암살폭탄 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상해에서 제작한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온다. 그러나 밀정이었던 김두형(본명 권상호)의 밀고로 사전에 폭탄이 발각된다. 폭탄의 밀반입경로를 추적하던 경찰은 황옥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의열단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첩보경찰이었다. 일본경찰은 황옥을 취조한 결과 그가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폭탄반입을 도운 혐의가 있음을 알아낸다. 황옥은 폭탄반입 작전을 주도한 김시현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나는 의열단의 정보를 캐기 위해 접근한 밀정으로, 의열단을 한꺼번에 검거하기 위해 무기반입을 도와주는 척 했을 뿐”이라고 진술하였으나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년 후 가석방되었다.



그가 의열단에 숨어있던 일본의 밀정이었는지, 경찰에 숨어있던 의열단원이었는지는 논란이 분분하다. 당시에는 위의 김두형(권상호)처럼 독립운동가 행세를 한 밀정도 많았고, 친일경찰이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람으로 오인 받았지만 사실은 밀정이었던 김태석이란 인물도 있었다. 악명이 높았던 미와 경부보 역시 독립운동 명망가들에게는 깍듯이 대하며 친분을 쌓기도 했다.

김원봉의 증언을 구보 박태원이 정리하여 해방직후 출간한 책 <약산과 의열단>에는 황옥은 독립운동가가 맞고, 재판에서 이를 부인한 이유는 전술의 노출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작성한 밀정 김두형(권상호)의 조사서에도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애국자로 기록되어 있다. <밀정>은 김동진 기자의 논픽션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에 기술된 황옥을 토대로 이정출을 재현한다. 그러나 황옥이라는 인물의 애매한 지점들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출소 후 행적을 가상으로 덧붙임으로써 영화적 판타지를 구현한다.



◆ 성패가 아니라 정의를 생각한다는 것

이정출이 마지막 거사를 감행하는 것은 허구이지만, 서사의 완결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는 단순한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조선이 독립될 것 같지 않아 변절했던 그는 지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는 싸움을 하고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김장옥과 연계순을 보면서 판단의 기준이 흔들린다. 그가 믿었던 것은 독립이니 제국주의니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생존과 성공을 원했고, 자기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친일의 길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생존을 위해 남을 잔혹하게 죽여야 하고, 불신과 배신이 난무하는 곳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거짓과 모반에 능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은 일본경찰이 아니라 오히려 의열단이었고, 그중 가장 약한 자에게 그는 인간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이 독립할 것 같은지를 따지지 않고, 지는 싸움에 나선다. “나는 사람들의 말은 물론이고 내 말도 믿지를 못하겠소. 나는 다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이오.” 라는 정채산의 말은 내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던 이정출의 머리를 말끔하게 씻어준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생각할 것. 그는 연계순의 피를 묻혔던 손으로 폭탄을 운반하여 거사를 실행한다. 김장옥의 가벼운 발가락을 히가시에게 건네면서.



지는 싸움을 한다는 것. 성패가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죽거나 집안이 망하고, 해방 후에도 모욕을 당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친일매국행위자들의 후손들이 득세한 세상에서 가난과 멸시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는 독립운동가들이 시류를 잘못 읽은 어리석은 이들이거나 순진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지는 싸움인줄을 알면서도 싸웠던 것이다.

친일매국행위자들 역시 그저 성공과 출세를 위해 친일 쪽에 줄을 선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매순간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불의한 선택을 하며 살아온 이들이다. 조선이 독립될 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친일을 했다는 말이 얼마나 윤리를 저버리는 말인지를 알아야 한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고, 해방 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게 된 역사를 말소하려 한다. 그 기획이 성공하면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수립에 대거 참여했던 친일매국행위자들이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건국절 논란, 일본군 위안부 합의 등 역사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듣는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실패가 쌓이면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갑니다”는 의열단장의 말은 남다른 울림을 갖는다.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다. 실패를 두려워말고, 지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밀정>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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