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에게 배우는 헬조선 단어를 사장시키는 방법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다음 침공은 어디?>는 마이클 무어의 신작 다큐멘터리로, 감독 특유의 너스레와 뚜렷한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인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식코>에 비해 한국의 관객들에게 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보여주는 총기소지 자유의 문제는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접점이 없다. <식코>이 고발하는 미국의 의료제도는 그나마 전국민의료보험을 갖추고 있는 한국 관객이 보기에는 앞으로 초래될 의료민영화의 문제를 각성시키는 효과를 지니지만,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음 침공은 어디?>가 보여주는 유럽의 복지제도는 복지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한국 관객이 보기에, 마이클 무어나 미국 관객보다 더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마이클 무어는 외국을 탐방하며, 미국에선 상상할 수 없었지만 다른 나라에선 엄연히 존재하는 복지제도를 보여주며 “왜 미국은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를 자문한다. 그 사이 한국 관객들은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할 나라가 미국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 뜨게 된다.

◆ 미국에는 없는 복지

영화는 엄청난 국방예산을 쓰고도 패전을 거듭해 온 미군에 대한 성토로 시작된다. 마이클 무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비롯하여 최근의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승전하지 못했으며, 석유 등 원하는 것도 얻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니 무능한 군대 대신 자신이 성조기를 들고 다른 나라로 진격하여 그 나라의 보물들을 가져오겠노라 호언한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이탈리아다. 그곳 사람들은 왜 항상 “방금 섹스하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지” 궁금해 하던 그는 이탈리아의 휴가 제도를 듣고 놀란다. 이탈리아는 연중 유급휴가가 8주다. 결혼휴가는 15일, 출산휴가는 남녀 모두에게 5개월을 준다. 그리고 휴가비에 보태 쓰라고 한 달 치 월급이 더 나온다. 휴가를 다 쓰지 못하면 다음해로 이월되어 쌓인다. 점심시간도 2시간이나 되니,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일과 휴식의 조화로 이탈리아인의 기대수명이 미국인보다 4년이나 길다. 이런 노동조건이 가능한 것은 그동안 노동조합이 꾸준히 싸우고 협상해 온 덕분이다.



이들은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모두 돌려받는다고 생각하며, 부자들도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중에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미국의 법정 유급휴가일수가 ‘제로’라고 말하니, 표정이 썩는다. 마이클 무어는 경영자에게 묻는다. 노동자들에게 휴가를 덜 주면 회사에 이윤이 더 많이 돌아가지 않냐고. 그러자 경영자는 의아하다는 듯 반문한다. “그렇게 더 부자가 되면 뭐가 좋은가요?”

두 번째로 향한 곳은 프랑스다. 영화는 고급 프랑스 요리의 조리 과정을 한참 보여준다. 쿡방인가 하는 순간 여기가 어딜까 묻는다. 최고급 레스토랑인가 싶겠지만, 그곳은 공립초등학교 급식실이다. 프랑스 학교식당에서는 급식이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코스로 나온다. 아이들은 식탁에 앉아있고, 직원들이 사기그릇에 담아 서빙해준다. 마이클 무어는 미국의 급식에 자주 나오는 감자튀김이나 햄버거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묻는다. 그런 거지같은 음식은 취급하지 않는단다. 고급치즈, 양꼬치, 닭고기, 아이스크림, 푸딩, 생수 등이 나온다. 마이클 무어가 프랑스 아이들에게 미국의 급식 식판을 사진으로 보여주자, 아이들은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그런 걸 먹는 애들이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미국 학교급식의 단가가 프랑스 학교급식의 단가보다 더 높단다. (미국 학교 급식의 문제는 <슈퍼 사이즈 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유럽은 지난 40년간 증세를 계속해왔다. 그 결과 미국에 비해 근로소득세를 더 많이 낸다. 하지만 무상의료, 무상교육, 최상의 학교급식 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국 노동자들이 의료비, 간병비, 교육비 등 각종 명목으로 쓰는 비용을 합하면 유럽노동자들의 세금보다 많이 쓴다. 게다가 미국은 소득세의 60%를 국방비로 쓰니, 복지를 할 돈이 없다.



핀란드의 학교는 숙제가 없다. 수업일수도 적다, 객관식 시험을 보지 않는다.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이 아니라, 예체능 위주의 협동심을 기르는 교육이다. 핀란드에서 교육의 목표는 스스로 사고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학교는 서열화 되어있지 않으며, 공립학교 중심으로 완전 평준화되어 있다. 가난한 집 아이나 부자 집 아이나 같은 학교에 다니며, 아이들이 혼자 통학한다. 교사는 이렇게 계급이 다른 아이들이 학창시절을 공유함으로써 이후 다른 계급을 착취하려 할 때 망설이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출신에 따라 차등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장래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진짜로’ 말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국민은 개·돼지이니 세습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한국의 교육부인사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슬로베니아에는 대학등록금이 없다. 따라서 학자금대출 등 빚에 허덕이는 청춘도 없다. 마이클 무어는 캠퍼스에서 유일하게 빚이 있는 학생을 찾아낸다. 그는 미국에서 온 유학생이다. 그는 미국에서 7천 달러나 들던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 반면에 교육과정도 우수하고, 100여개나 되는 수업이 영어로 개설되어 있다고 말한다. 슬로베니아에서도 등록금을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이 9개월간 시위를 벌인 끝에 정권이 무너지고, 무상교육을 지켜냈다. 영화는 당시의 시위장면에 살인적인 등록금으로 빚에 쪼들리면서도 평화로운 캠퍼스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미국의 대학생들을 대조적으로 비춘다.



◆ 역사에 대한 반성, 그리고 용서

독일에는 미국에선 사라진 중산층이 존재한다.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로 주 36시간 일을 한다. 평일에 2시면 퇴근하여 개인적인 삶을 즐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국민의료보험에서 3주간 리조트 스파를 무료로 이용하게 해준다. 이런 복지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얻어 낸 것이다. 회사의 감독이사회의 절반이 노동자 대표로 구성되어, 노동자가 회사의 경영에 참여한다. 독일 노동자들은 업무시간 이외의 개인생활을 철저하게 보호받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파시즘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다. 독일 학교에서는 역사적 과오와 죄악에 대해 철저하게 가르친다. 마이클 무어는 노예제를 비롯한 역사적 죄악을 반성하지 않는 미국을 떠올린다.

포르투칼에서 마약의 복용이나 소지는 범죄가 아니다. 마약복용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될 경우에만 치료한다. 그래도 복용률은 갈수록 감소한다. 마이클 무어는 미국에서 마약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암시한다.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지도자가 암살되었고, 흑인들이 많이 사용하던 종류의 마약에 대하여 단속을 강화하였다.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된 흑인들은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수감된 흑인들은 투표권을 빼앗기고, 저임금의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노예와 같은 처지가 된다.



노르웨이의 죄수들은 감금되어 있다기보다는 외딴 곳의 제한된 장소에서 자율적으로 생활한다. 교도소는 형벌을 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사회복귀를 위한 복지시설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재소자의 5년 이내 재범률은 20%로 낮다. 반면 엄격하고 폭력적인 규율로 다루어지는 미국 재소자들의 5년 재범률은 80%에 이른다. 이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노르웨이에도 테러사건이 있었다. 2011년 54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마이클 무어가 묻는다. “아들을 죽인 테러범이 기껏해야 21년 동안 편안한 교도소에서 지내도 괜찮은지, 혹시 죽이고 싶지는 않은지?” 아버지는 그 사람과 같은 선상에 있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마이클 무어는 911이후 미국의 보복정서와 사뭇 다른 점을 확인하고 잠시 숙연해진다.



◆ 성평등

튀니지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2010년 노점상 청년의 분신으로 촉발된 ‘재스민 혁명’ 이후 획기적인 성평등을 이루고 있다. 국회의원수를 50:50으로 하는 남녀동수의원제와 낙태합법화는 서구에서도 미처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독재자가 물러나고 혁명이 수습될 무렵, 남성들은 혁명에 참여하였던 여성들의 권리를 배제한 채 새 헌법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을 비롯하여 여러 혁명에서 반복되어 왔던 일이다. 그러나 튀니지 여성들은 이에 항의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국민다수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 여성의 권리가 명시된 헌법이 채택되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1975년 여성노동자와 주부들이 모두 일손을 놓는 파업을 벌였다. 사회는 마비되었고, 그동안 사회가 여성들에 의해 돌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힘에 의해 1980년에 세계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탄생시켰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로 많은 은행들이 부도사태를 맞았을 때, 여성들이 경영하던 은행들만 건재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부실은행을 살리는데 공적자금을 쏟아 붓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한 투기를 일삼았던 금융인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리고 50인 이상 사업장의 이사회를 구성할 때 여성들을 40%이상 두도록 하는 의무할당제를 실시하였다. 여성 CEO들은 “‘리만 브라더’가 ‘리만 시스터’였으면 그토록 비정상적인 투자를 하진 않았을 것”이라 말하며, 경쟁과 모험을 진취적이라 여기는 남성적 사고의 한계와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영화는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들의 얼굴을 한참동안 비춘다.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여성들의 얼굴에서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의 존엄과 실존이 드러난다.

마이클 무어는 다른 나라의 가장 돋보이는 제도를 통해 노동, 복지, 교육, 인권, 평화, 성평등 등 다양한 가치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미국사회의 현실과 견주어본다. 마이클 무어는 다른 나라의 훌륭한 제도들이 어쩌면 미국에서도 가능한 것들이었으며, 기원을 따져보면 오히려 미국에서 유래된 것들임을 깨닫는다. “내 나라를 돌려줘”라 말했던 마이클 무어가 또 다시 문제해결의 물꼬를 ‘미국의 본원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에서 찾는 결말은 인상적이다.



한국 관객으로서 감회는 좀 다르다. 복지를 경험해보기도 전에 ‘복지병’이라는 말부터 들어온 한국인으로서 영화가 보여주는 복지사회는 마치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물론 개중에는 과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잡초가 아니라 꽃을 따러 왔다”는 마이클 무어의 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놀라운 점이 많다. 근본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점이 가장 놀랍다. 또한 미국을 유일무이한 대안으로 생각해 왔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미국도 벗어나려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하게 된다. 이제 미국을 글로벌 스탠다드 인양 사고하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전 세계로 눈을 돌려 한국이 지향해야 될 사회가 무엇인지 새롭게 구상할 때이다. 완전히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사회를 구상하고 상상한들 이토록 완고하게 이루어져 있는 사회를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마이클 무어는 어떤 제도이든 투쟁의 산물이었음을 짚어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보여주며 못을 박는다. “영원히 서 있을 것 같던 장벽도 몇 명이 정과 망치로 구멍을 내기 시작하면서 무너졌다” 요컨대 “짱돌을 들라”는 뜻이다. 지금 몇 명이라도 짱돌을 들어 벽에 구멍을 내기 시작해야 한다. 거기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그렇게 사람들이 늘어나면 결국 장벽이 무너진다. 헬조선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사회의 가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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