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생 최대 위기 봉착한 김희애에게 지금 필요한 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김희애는 20대의 전성기 이후 40대에 3편의 대표작을 남긴 흔치 않은 여주인공이다. 2007년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를 시작으로 그녀는 안판석·정성주 콤비의 JTBC 화제작 <아내의 자격>과 <밀회>에서 연달아 여주인공을 맡으면서 또래의 중년 여배우들과는 다른 위치에 올라선다.

사실 김희애의 연기는 잘 만들어진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 같다. 화려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으며 소박한 진심의 감정이 전해지는 연기도 아니다. 그녀의 연기에 독특한 개성은 없고 감정의 흐름은 언제나 예상 가능하다. 다만 드라마에서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들만은 여백 없이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때론 너무 놓치지 않아서 슬픔의 호흡과 기쁨의 미소가 다소 부담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을 만큼.

그럼에도 김희애는 콘크리트에 생긴 균열처럼 뚜렷한 균열이 있는 인물들을 연기할 때 확실히 번들거리는 ‘물광’ 아닌 진짜 빛이 난다. 남아선호사상 시대의 그늘진 인물이었던 <아들과 딸>의 후남이도 내면의 공허 때문에 친구의 남편을 사랑의 제물로 삼은 <내 남자의 여자> 화영도 마찬가지다. 하나하나 쌓아올린 캐릭터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감정적인 동시에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한 배우다.

특히 안판석 정성주 콤비와 만난 김희애는 지금 이 세계의 균열 때문에 흔들리는 인간상을 그려내는 배우로 자리한다. <아내의 자격>의 여주인공 윤서래는 남아선호사상이 당연시 되던 1970년대 어느 시골 아닌 21세기의 물질선호사상의 중심인 강남 한복판에 뚝 떨어진 감성적인 여주인공이다. <아내의 자격>은 소박하고 따뜻한 감성을 지닌 윤서래가 아이의 교육 때문에 시댁이 있는 강남에 입성했다 망가지고, 자각하고, 극복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김희애는 21세기판 강남 후남이라 할 수 있는 윤서래로 꽤 묵직한 울림을 준다.



<아내의 자격>의 윤서래는 김희애가 가진 장점과 어울리는 맞춤옷이긴 했다. 정석적이고, 감정의 응축과 폭발이 있고, 메시지가 있다. <밀회>의 오혜원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었다. 바로 특별함이다. 연하의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지는 오혜원을 그저 멜로물의 여주인공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그녀는 <아들과 딸>의 후남이나 <아내의 자격>의 윤서래처럼 주류사회의 ‘콩쥐’도 아니다. 오혜원은 그녀가 속해 있는 고급예술계와 재벌가 사이를 오가며 구린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성공적인 이중인격자다. 얕은 수가 보이지 않는 치밀하고 우아한 ‘팥쥐’인 셈이다.

<밀회>는 천재 피아니스트와의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우아한 인물이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순간에 내면의 진짜 나를 발견해가는 흥미로운 흐름의 드라마다. 김희애는 오혜원의 감정을 때론 과장하고 때론 감추는 식으로 조율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밀회>를 성공으로 이끈다. <밀회>의 오혜원보다 더 특별하고 매력적인 인물을 이 배우가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밀회> 이후의 김희애의 행보는 사실 느낌표보다 물음표에 가깝다. 비단 <무한도전>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무모하게 유쾌한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설마 YG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긴 그녀가 지천명의 씨엘을 꿈꾸는 건 아닐 테니.



그러면서도 이 배우에게는 어쩔 수 없는 길이겠구나, 싶은 지점도 있다. 김희애는 사실 하하호호 웃으며 동시에 복수의 칼날을 가는 지금의 흔한 주말드라마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니시리즈 여주인공의 젊은 엄마로 등장하기엔 너무 무게감 있는 배우가 됐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밀회> 이후 장르물을 선택했다. 김희애가 보여준 <미세스 캅> 최영진은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생활의 피로가 느껴지는 중년의 인물을 치밀하게 그려내긴 했으나 과연 여형사와 어울렸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최근 SBS <끝에서 두 번째 사랑>에서 김희애는 담담한 중년 로맨스물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중이다. 이 드라마에서 김희애는 베테랑 드라마 CP 강민주로 등장한다. 강민주는 일에 있어서는 담대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인물이다. 강민주는 그녀가 기존에 연기했던 여주인공들처럼 균열의 콘트라스트가 뚜렷한 인물은 아니다. 실패와 좌절은 있으나 인생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다. 오히려 소소한 내면의 감정의 움직임과 떨림을 일상적으로 그려내야 하는 인물이다. 더구나 담백한 로맨틱코미디 스타일의 이 드라마에서 너무 과한 감정 표현은 인위적으로 느껴지기 쉽다.



<끝에서 두 번째 사랑>의 강민주는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이지만 안타깝게도 김희애의 연기가 그리 사랑스럽거나 매력적인 건 아니다. 교과서적이지만 지루하다. 일상적이고 편안한 짧은 대사들이 작위적으로 들려 우스꽝스럽다. 무언가 너무 애쓰고 있거나 너무 보여주려 하는 장면에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가끔은 그녀에게 제발 그렇게 속삭이지 마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장면들도 있다. 일상에서의 평범한 사람들은 사랑과 슬픔, 그리고 수많은 것들이 뒤섞인 감정들을 털어놓을 때 그렇게 자주 속삭이지는 않으니까.

어쩌면 연기 인생 최대 위기에 봉착한 베테랑 배우인 김희애에게 지금 필요한 건 우아한 거짓말이 아닌 물처럼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의 목소리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녀를 <밀회>의 오혜원으로 최고의 마침표를 찍은 한때의 배우로 기억하기 전에. 혹은 <부산행>의 좀비 앞에서도 거친 호흡으로 얼굴을 찡그리다 살려달라고 나직하게 속삭일 것 같은 코믹한 배우로 생각하기 전에.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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