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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가 있었기에 다윈의 ‘종의 기원’도 나올 수 있었다
기사입력 :[ 2016-09-26 17:56 ]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적 과학자, 훔볼트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괴테의 소설《파우스트》Ⅰ이 1808년 출간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파우스트가 훔볼트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파우스트 속에는 훔볼트가 있고, 훔볼트 안에는 파우스트가 있다’는 말도 나왔다. 파우스트는 훔볼트처럼 지칠 줄 모르는 지식욕에 열병을 앓는 인물이었다. 훔볼트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자연의 숨겨진 힘’을 모두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파우스트는 1장에서 “나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힘을 찾아낼 것”이라며 “그것은 세상을 묶어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바로 훔볼트가 추구한 탐구의 목표와 의의였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파우스트는 환멸과 우울에 빠진 나머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훔볼트는 긴 생애에서 내려오기 직전까지 지식욕을 활활 불태웠다.

훔볼트는 87세 때인 1857년에 《코스모스》Ⅳ권을 내자마자 Ⅴ권을 내기로 결심했다. Ⅴ권은 죽음과의 싸움이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왕실 도서관에 진을 치고 앉아 독서와 집필에 매달렸다. 그는 이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859년 5월, 향년 89세에 타계했다.

◆ 생애 끝까지 과학 탐구하고 전파 활동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는 ‘아침에 진리를 발견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열정으로 세계를 탐험한 지리학자이자 박물학자였다. 그의 탐험의 절정은 1802년 침보라소 산 등정이었다. 현재 에콰도르에 속하게 된 침보라소 산은 해발 6,268미터로 당시 세계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었다. 겁먹은 포터들은 만년설이 쌓인 지점에 이르자 운반을 포기했다. 휴화산 침보라소의 정상은 두꺼운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훔볼트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훔볼트와 동행자 세 명은 해발 5,000미터에서 너비 5센티미터의 좁은 산등성이 위에 납작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찬바람에 손발이 무감각해졌고 입김은 알알이 얼어 머리칼과 수염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희박한 공기 속에서 사투를 벌였다. 기압계, 온도계, 육분의, 인공수평기, 시안계(하늘의 푸른 정도를 측정하는 기기)를 챙겨 간 훔볼트는 수시로 이들 기기를 꺼내 고도, 중력, 습도를 측정했다. 뿐만 아니라 등반 도중에 마주치는 생물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노트에 꼼꼼하게 적었다. 세상의 최고봉에 있는 지식을 모두 섭렵하고야 말겠다는 훔볼트의 야심은 해발 6,000미터(훔볼트가 측정한 고도)에서 막히고 말았다. 너비 20미터에 깊이 180미터인 거대한 크레바스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훔볼트는 프로이센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베를린훔볼트 대학 설립에 참여한 프리드리히 폰 훔볼트가 그의 형이다. 형제는 지적 발달을 중시한 어머니가 모셔온 계몽주의 지식인들로부터 집중적인 사교육을 받았다. 프리드리히는 모친의 기대에 부응해 공직에서 활동한 반면 알렉산더는 물려받은 유산을 들고 자연으로 뛰쳐나가 탐험하고 연구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훔볼트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했다. 키는 약 173센티미터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허리를 곧게 펴고 자신만만하게 다녀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움직임이 날렵했다. 탐구심에 넘치는 눈은 항상 반짝거렸다. 그는 청산유수였고 보통 사람들보다 말이 두 배 속도로 빨랐다.

그는 1799년 중남미 탐험에 나서 자기, 기상학, 지질학, 동물학 등 다채로운 분야의 자료를 수집해 1804년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는 3년 뒤인 1807년 《식물지리학에 관한 고찰》을 독일어판과 프랑스판으로 동시에 출간하면서 서구 과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탐험의 시대였고 발명과 발견의 시대였으며 정치적인 변혁의 시대였다. 훔볼트는 어린 시절 《제임스 쿡 선장》과 《루이앙투안드부갱빌》이라는 잡지를 읽으며 먼 곳을 상상하곤 했다. 섬유산업에 혁신이 이뤄졌고 증기기관이 발명됐으며 피뢰침이 세워졌고 천연두 백신이 접종되기 시작했다. 앞선 두 세기 동안 서구사회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해 관찰 대상을 우주로 확장하고 미생물로 좁혔으며 뉴턴을 필두로 우주의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시작했다. 서구사회는 자연을 복잡한 시계와 같은 장치로 인식했다. 훔볼트가 일곱 살이 되기 직전 미국이 독립을 선포했고, 스무 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 통합 과학서 《코스모스》로 과학 대중화

훔볼트는 르네상스적인 과학자였다. 이는 그가 잊히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코스모스》 집필에 착수한 1834년은 과학자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때였다. 과학은 분화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시기에 모든 분야를 통합하는 저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65세에 쓰기 시작해 12년 뒤인 1845년 완성한 《코스모스》Ⅰ은 천문학과 지구과학 생물학을 아우르는 야심작이었다. 그는 이 책으로 “그렇게 느슨한 연구활동을 비상한 솜씨로 엮어 하나의 아름다운 매듭으로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두 달 만에 독일어판만 2만부가 나갔다. 그러나 포괄적 접근 방법은 훔볼트 이후 시류에서 벗어났고 인기를 잃었다.

훔볼트는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와 교유하며 그로부터 자연이 연결된 하나라는 자연관을 받아들여 확장하고 구체화해 전파했다. 그가 ‘자연은 살아 있는 전체이며 생명체들은 그 속에서 서로 결합해 그물구조를 형성한다’는 생각을 집대성한 책이 《코스모스》다.

이런 자연관을 바탕으로 그는 지각이동설을 처음 내놓았고 핵심종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그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해변 식물이 비슷하다는 점을 관찰하고 분석한 뒤 이로 미루어 두 대륙은 태곳적에 연결돼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심종은 남미의 야자나무처럼 생태계에서 많은 동식물을 번성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종을 가리킨다. 그는 등온선이라는 개념도 창안했다.

훔볼트는 필요하면 연결성의 개념을 돈이 되는 데에도 적용해 성과를 냈다. 러시아 니콜라이 1세가 경비를 전액 지원한 러시아 여행을 할 때였다. 그는 후원에 보답하는 취지에서 러시아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는 몇 가지 광물이 동시에 발견되고 금이나 백금 광산에서 다이아몬드가 함께 나오곤 한다는 경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알렉산드라 황후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황후 폐하를 위해 기필코 다이아몬드를 찾아드리겠다”고 장담했다. 과연, 1829년 7월 그의 수행원 중 한 명이 광부들에게 지시해 우랄산맥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이 소식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됐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전역에서 다이아몬드 37개가 발견됐다.

◆ 훔볼트가 아니었다면 다윈은 나오지 않았을 것

훔볼트가 과학 발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측면은 미지의 자연을 탐구하고 진리를 발견하는 정신과 열정을 퍼뜨린 것이다. 그는 이른바 ‘서신공화국’의 중심 인물이었다. 서신공화국은 17~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원거리 서신 교환을 통해 지식과 감성의 공감대를 형성한, 국경과 종교와 언어를 초월한 공동체를 가리켰다. 서신 교환을 통해 아이디어가 전파됐고 의견이 교류됐다. 그는 1850년대 중반에 연간 2500~3000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빚에 쪼들리면서도 젊은 과학자와 탐험가들을 물질적으로도 후원했다. 수학자 가우스(1777~1855)는 “타인을 성심성의껏 돕고 격려한 선행이랴말로 그의 왕관에서 가장 빛나는 보물”이라고 평가했다.

찰스 다윈(1809~1882)이 1832년 비글호에 탑승해 갈라파고스 제도를 비롯한 지역의 생태계를 관찰하고 분석하게 된 데에는 훔볼트의 영향이 가장 컸다.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반일 때 훔볼트의 남아메리카 탐험기를 읽었다. 다윈은 “그 책은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고 일기장에 적었고, 중남미를 탐험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윈은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훔볼트가 크게 기여한 일이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이다. 남아메리카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묘사를 읽은 남아메리카인들은 자신의 대륙이 얼마나 독특하고 아름다운지 자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여기에 더해 식민주의와 노예제를 비판해 남아메리카 해방운동에 사상적 씨앗을 제공했다. 남아메리카 독립투쟁 지도자 시몬볼리바르(1783~1830)는 “훔볼트는 펜으로 남아메리카를 잠에서 깨웠으며 남아메리카인에게 자신의 대륙을 자랑해야 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설명해줬다”고 평가했고, 같은 내용을 1821년 훔볼트에게 보낸 편지에도 적었다. 이는 훔볼트 해류, 훔볼트 오징어 등 그의 이름이 남미 쪽에 많이 붙은 이유다.

◆ 서구 자연관 바꿔 자연보호 운동에 큰 영향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훔볼트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다. 서구의 기존 자연관은 ‘자연은 특별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다’(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다’(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마음껏 활용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벌채는 맑은 공기를 퍼뜨리고 기후를 향상시킨다는 것이 기존 생각이었다. 훔볼트는 산림벌채의 악영향을 분석했고 인류에 의한 환경파괴를 경고했다. 그의 사상은 조지 퍼킨스마시와 존 뮤어가 앞장선 자연보호〮자연보존 운동으로 계승된다. 헨리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훔볼트를 사사해 《월든》을 썼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면서도 서정적으로 묘사한 그의 글은 많은 문인에게도 영향을 줬다. 애드거앨런 포, 월트휘트먼, 올더스헉슬리, 윌리엄워즈워드, 새뮤얼콜리지 등이 그들이다.

이 책의 저자 안드레아울프는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했고 지금은 영국에서 활동한다. 앞서 《Founding Gardeners》《Chasing Venus》 등을 쓴 과학 분야 저술가다. 이 책은 LA타임스 최우수 도서상과 코스타 상, 영국왕립협회 상 등을 받았다.

전문 저술가가 쓴 훌륭한 책이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자연보호 및 자연보존 등을 주제로 다룬 뒷부분 3개 챕터는 한 챕터로 묶어도 무방했을 듯하다. 그 대신 훔볼트의 시대를 종횡으로 소개하고 그가 과학계에서 선 위치를 더 설명해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스티븐 F. 메이슨이 쓴 《과학의 역사》에 훔볼트는 단 한 번 등장한다. 독일과학자회의 총회에서 지리학자 겸 탐험가인 훔볼트가 회장으로 연설했다는 대목이다. 훔볼트는 과학자로서 비중이 크지 않았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 속에서 훔볼트에 대한 당대의 열광을 설명할 수도 있다. 아주 작은 부분인데, 여러 여성으로부터의 관심에 냉담한 채 평생 독신으로 지낸 훔볼트가 그럼 동성애자였는지 논란이 있다. 저자는 이를 잠시 언급하지만 허무맹랑한 의혹이었다며 건너뛴다. 훔볼트를 기리는 마음에서 그리 했다면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지만, 그렇게 가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미국 국립인문학재단]

[책 정보]
《자연의 발명》, 안드레아울프 지음, 양병찬 옮김, 생각의 힘 펴냄, 63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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