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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정우성 연기력을 지적하는 자들을 용서하소서
기사입력 :[ 2016-10-04 11:04 ]


-‘아수라’, 원래 궁극의 느와르에 카타르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좆 됐을 때 꿈에서 깨 주위를 돌아봤는데
내 생각보다 남은 놈들이 몇 되지 않을 때
손 짤린 공돌이 친구와 먼저 간 친구 3일째
운구만 몇 새끼 째 계속 될 때

(중략)

앵꼬난 희망 절망의 배둘레햄 부정의 고도비만
떨쳐내려 술을 담아 밤새 변기에 머리를 박고 답을 찾아봐 내 인생
약에 빠지던가 아님 약아 빠져야 살 수 있다던가
둘 다 아님 닥치고 짜지던가
짱꼴라 짱깨 조선족 사할린 고려인 빨갱이 그게 내 이름 안산
-차붐의 <안산 느와르> 중에서-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이것은 우연인가. 영화 <아수라>는 안남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지독한 느와르이다. 그런데 그 안남은 경기도의 어느 도시이자, 재개발의 꿈으로 와글거리는 곳이고, 외국인들이 들끓는 혼종적인 공간이다. 그러니까...안남은 현실의 안산 비슷한 어떤 도시이다.

부제로 ‘안남 느와르’라고 붙이면 딱 맞을 <아수라>는 ‘약아 빠져야 살 수 있다’고 믿는 주인공이 ‘약에 빠진’ 어떤 이와 벌이는 실랑이에서 시작되어, 장례식장에서 펼쳐지는 혈투로 하나 둘 죽어나가다가, 짱꼴라 짱깨 조선족 등에 의해 대미를 장식하는 그런 영화이다. 주제 역시 ‘앵꼬난 희망’에 수렴한다. 물론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시대 절망의 공기를 (영화 속 ‘공중에 흩뿌려진 필로폰 연기’처럼) 흡입한 이들 중 예민한 촉수를 지닌 예술가들이 있었고, 누군가는 랩으로 누군가는 영화로 만든 것이다. 즉 ‘동시대성’이라는 필연의 산물이다.



◆ 동시대 한국 장르영화의 정점에 서다

혹자는 <아수라>를 보고, ‘너무 지나치다’는 논평을 내놓는다. 이른바 ‘과잉’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 지적은 <아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수라> 이전의 일련의 한국 장르영화들이 꾸준히 보여주었던 어떤 흐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익숙한 사회문제를 바탕에 깔고 조폭, 정치인, 형사, 검사 등이 엉겨 붙어 싸우는 비슷한 영화들이 이제는 지겹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혹은 점잖게, 자기복제를 거듭해오다 몰락의 길을 걸었던 홍콩 액션영화들을 가리키며,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우려를 드러내기도 한다. 필자는 이들에게 한도경(정우성)의 마지막 말을 들려주고 싶다. ‘좆이나 뱅뱅’이다.

물론 이러한 말들은 일말의 진실을 품고 있다. 즉 뒤집어 말하면 이해가 된다. <아수라>는 비슷한 장르의 한국영화들 중 정점이자 정전에 해당된다는 사실, 오우삼 감독의 영화들에서 느꼈던 비극의 아우라가 <아수라>에 깊이 베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반환 직전의 홍콩만큼이나 한없이 암흑(느와르)에 가까운 절망의 정서를 품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편 많은 관객들이 <아수라>의 결말이 허무하다고 불평한다. 당연하다. <아수라>는 사회문제를 바탕에 깔고 뭔가 해결되는 판타지를 주어 카타르시스를 담아내는 (가령 <베테랑>과 같은) 액션 영화들과 장르를 달리한다. 진정한 느와르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카타르시스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폐쇄적인 결말은 ‘출구 없는 미궁’이라는 극도의 암울함을 막막하게 전하는데, 이는 느와르의 본령에 충실한 자기 완결적 서사이자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감독의 세계관을 타협 없이 밀어붙인 미학적 결과물이다.



◆ 안남이라는 지옥도

영화 <아수라>는 어느 장면 하나 버릴 것 없이, 주제에 충실하다. 몇 가지 예시. 안남시 재개발위원회 회의에서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위협하다 물을 쏟은 안남시장(황정민)은 “위원회님들이 너무 무서워서 제가 오줌을 싸버렸잖아요”라며 적반하장의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팬티까지 벗은 그가 자신의 심복들을 모아놓고 ‘진짜 회의’를 하던 중, 충복인 은실장은 팬티를 든 채 엉거주춤 시장의 가랑이 사이에 팬티를 넣고 눈치껏 올려준다. 그때 위원회에서 반대파로 나섰던 태사장이 들어와 시장과 이후 작전을 논의한다. 요컨대 여기는 팬티 벗고 설치는 인간들의 이전투구 장이고, 적도 아군도 없는 막장이라는 묘사를 이보다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태사장이 깡패들을 데리고 쳐들어와 막상 공격하지 않자, 시장 일파가 순식간에 커터 칼을 깡패들의 손에 쥐어주고 시장이 커터 칼을 향해 돌진한다. 이내 시장의 이마 위로 피가 흥건히 흐르고, “리퍼트 대사 피습사건 때 보다 더 의연히 대처한 시장”이라는 뉴스가 뜨자 쾌재를 부른다. 오 놀라운 현실의 패러디!



영화 초반에 제시되는 안남시장의 면면을 보며 ‘아니, 저토록 조폭 양아치에 가까운 시장을 시민들은 왜 뽑았을까?’라는 자문을 하다가, 아차 이명박도 시장과 대통령에 선출되었었지, 라는 정신이 들면서 ‘아마 부자 되게 해주겠다는 공약을 걸었나보다’ 라는 생각에 미칠 무렵, 과연 신도시재개발 시민설명회 장면이 펼쳐진다. 광주 대단지 사건과 산동네 성남이 ‘천당위의 분당’이 된 도시개발의 역사를 죽 읊던 시장이 안남을 ‘제2의 분당’으로 만들겠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쥘 때, 너무도 익숙한 기시감에 뒷목이 뻐근해진다. 그뿐인가. “그 검사, 지방대 나온 놈, 영남 출신도 아니고”란 말이나, “서울대 나온 의사에게 수술 받게 병원장에게 부탁했다”거나 “이거 조중동에 뿌리고, 안되면 오마이 한겨레에 준다”는 너무도 현실감 돋는 대사들에 통점이 아려온다.

오해는 마시라. 영화가 단순히 ‘헬조선’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헬조선’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대한민국의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는데 있지 않다. 그보다 이러저러한 문제를 지닌 대한민국을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헬’로 받아들이는 도저한 현실인식에 있다. 지옥에는 해법이 없고 출구가 없다. 그리고 이미 악으로 판명된 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선악의 구분이 없다. 그곳에는 영원한 고통만 존재하며, 고통이 고통인줄도 모르는 피로만이 존재한다.

<아수라>는 (가령 <내부자들>처럼) ‘헬조선’의 현실을 얼마나 적확하게 고발하느냐에 관심이 없다. 다만 ‘총체적 헬’에 대한 인식과 관점이 일관된 세계관으로 영화전체를 지배하며, 그 모든 것이 느와르의 미학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 악이 아닌 죽음이 있을 뿐

영화 <아수라>의 피날레는 왜 장례식장일 수밖에 없을까. 한도경의 아내는 왜 암에 걸려 죽어갈까. 그토록 악랄하던 검사는 왜 자신이 육체적 공격을 당하자 한없이 비굴한 모드로 바뀌었을까. 이 모든 것이 주제에 상응한다.

암에 걸린 아내의 말, “당신이 나쁜 짓 한 게 나한테 온 것”은 공연한 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메타포이다. 권력과 폭력과 탐욕으로 엉겨 붙어 싸우는 시장, 사장, 형사, 검사들의 아귀다툼 바로 옆에 암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 즉 생활세계로서의 안남시가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필로폰을 실은 화물차가 폭발하면 필로폰 연기를 들이마실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세계에 살고 있다.

빗길 추격전으로 몇 중 추돌사고가 나고, 우연히 그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를 사고를 당한다. 장례식장에서 칼부림이 나면 옆 빈소 상주는 아무 이유 없이 겁에 질려 벌벌 떨어야 한다. 한도경이 더럽고 비굴하게 돈을 벌어, 가망 없는 아내의 수술비를 대는 것이 허망한가? 그것은 자본주의적 탐욕으로 굴러가는 경제로 생활세계가 붕괴된, 지속 불가능한 한국거시경제의 암울한 은유이다.



모든 사건의 피날레가 장례식장인 것도 멋진 은유이다. 그러니까 이곳에는 이미 죽은 사람과, 곧 죽을 사람들만 존재한다. <공공의 적><추격자>등 많은 한국의 장르영화들이 선악의 대립이 아닌, 더 나쁜 사람과 덜 나쁜 사람의 대립이 되어 온 건 익히 아는 사실이다. 정우성은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이미 충분히 나쁘거나 더 나빠질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선악이 없이 악만 존재한다면, 그때의 악은 악일 수 있을까. 악은 선이라는 대립물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획득한다. 즉 선이 없는 순간, 악이라는 의미자체도 소멸되며, 그렇기 때문에 ‘악과 차악의 대립’이란 말도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립하는가. <아수라>의 세계에는 악이 아닌 죽음이 존재할 뿐이며, 이미 죽은 사람과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대립할 수가 없다. 그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행해 달려갈 뿐이다. 무엇인가의 대립으로 보이는 것은 이 ‘죽음을 향한 열망’의 본질을 감추는 알리바이일 뿐이다.

따라서 영화의 피날레가 장례식장, 검시실, 시체안치실에서 펼쳐지는 것은 필연이다. 이 액션은 통쾌함을 지니지 않는다. 밖을 향해 열리지도 않는다. 이미 ‘죽음의 신’ 하데스가 관장하는 이곳에서 이들의 피비린내 나는 액션은 모두 무위로 수렴되며, 그곳은 거대한 무덤이 된다. 처음 안남시를 비추며 시작되었던 이 영화의 오프닝과 맞물려 생각해보면, 안남시 전체가 사실 거대한 무덤에 다름 아니다.



◆ 실존의 극한, 종말의 예감 그리고 정우성의 존재감

한도경은 안남시장과 검사 사이에 놓인 이중첩자이자 미끼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윤리적 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밀정>에서 이정출이 친일경찰과 의열단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할 때, 거기에는 팽팽한 윤리적 긴장이 존재한다. 선악과 정의라는 천 길 낭떠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수라>에서 검찰과 시장 사이에 윤리적 낙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통점이 더 많다. 그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고, 그 욕망이 자본과 권력을 향한다는 점에서 같다. 심지어 “같은 나랏녹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한도경이 무엇을 선택하든 그는 이용만 당할 뿐이고, 그들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따라서 <아수라>의 세계에서 윤리적 결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피로와 고통에 찌든 육체만 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은 없다. 오직 때리면 아프다는 사실만 존재한다. 그것을 알고 견디는 자와 모르고 덤비는 자가 있을 뿐이다. 안남시장이 알량한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팔 하나를 자르라고 윽박지르는 깡다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악랄하던 검사가 육체적 공격을 당하자 비굴해지는 것은 이러한 주제의식의 확인이다.

고통과 피로에 찌든 육체, 죽어야 비로소 쉴 수 있는 욕망의 아수라장. <아수라>가 말하고픈 요지는 이것이며, 따라서 더 할 나위없는 작명이다. 혹자는 정우성이라는 탁월한 미남에게 왜 저토록 험난한 역할을 맡겼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심지어 날고 기는 조연들 속에서 정우성의 연기력이 가장 딸린다는 쓴소리를 내뱉기도 한다. 주여, 저들은 <아수라>의 주인공이 반드시 정우성이어야만 한다는 지극한 진리를 알지 못하나이다.



카메라는 그의 얼굴에 떨어지는 음영을 그 어떤 표정보다 집요하게 다룬다. 빛나던 청춘에 <비트>와 <태양은 없다>를 찍었던 정우성이 ‘피로와 상처에 찌든 얼굴’로 돌아와, 윤리적 파탄과 약삭빠름의 한계를 드러낼 때 느껴지는 먹먹하고 공허한 회한이 그 어떤 대사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정우성은 어느 순간 톰 크루즈처럼 보이기도 한다. 빗길에 운전대를 잡은 그가 연신 눈 위로 흐르는 피를 손으로 훔치며 초조와 비탄의 눈빛을 희번덕거릴 때, 배우 정우성은 지금까지의 어떤 지점을 넘어선다. 그리고 관객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느와르보다 가장 느와르적인 영화에 기가 질려 감탄할 말조차 빼앗겨버린다.

영민한 사람이라면 한국영화가 홍콩영화의 장르적 궤멸을 반복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시 홍콩영화가 그토록 어두웠던 것은 ‘홍콩 반환’이라는 종말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지금 한국영화가 당시 홍콩영화보다 더 궁극의 절망과 허무를 세계관적으로 전유하고 있다면 우리 앞에 예기불안으로 아른거리는 저 종말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특이점이 오고 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아수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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