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성매매 장면 촬영 논란, 뭐가 문제일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고생을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스크린에 뜨는 결과물은 그들이 투자한 노력의 겨우 몇 퍼센트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영화 자체지만 그래도 관객들이 그 노력과 고생도 좀 알아주길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 아닐까.

<아수라>에 출연했던 김원해도 자신의 고생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스포츠 동아에 실린 인터뷰의 다음 부분도 분명 자랑이다.

“영화에서 10대쯤 맞으면 실제 촬영에선 200대 정도 맞는다고 보면 된다. 감독님이 진짜처럼 보이길 원했다. 액션에는 타협과 양보가 없다. 많이 맞았다. 입 안이 피범벅이 됐다. 아내가 보더니 누가 그랬냐고 묻더라. 우성이한테 맞았다고 했더니, 정말 정우성에게 맞았냐면서…, 좋아하더라. 하하!”(http://sports.donga.com/3/all/20161004/80620083/3#_adtep)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여기엔 어느 정도 허세가 섞여 있을 것이고 촬영장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살벌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10/200이라는 숫자를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합의된 상황이고, 때리는 사람이 정우성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저항없이 얼굴을 200대 맞고 있는 광경을 상상하는 건 결코 즐겁지 않다. 인터넷에서 이 인터뷰가 “이익!”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킨 건 당연하다. 지금 우리는 폭력을 당연시하지 않는 문명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문명화된 작업 환경이라면 배우가 굳이 200대를 맞지 않아도 10대 맞고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테크닉이 투입되었다고 여기는 게 정상이다. 예술작품은 진정성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당사자가 괜찮다고해서 괜찮은 것도 아니다. 이는 곧 같은 일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작업 환경과 연결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와 관련된 최근 소동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소동은 이 영화의 홍보를 위해 윤여정이 가진 인터뷰와 기자간담회에서 시작되었는데, 기본 내용은 윤여정이 각본엔 상황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성매매 장면을 찍느라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자) 배우에 대한 (남자) 감독의 착취에 대한 일반적인 성토로 흘러갔고 지금 윤여정과 <죽여주는 여자>의 홍보팀은 이를 막느라 애를 쓰는 중이다.

필자도 <죽여주는 여자>의 기자간담회에 참석했었는데, 당시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윤여정의 발언도 배우가 힘겨운 감정노동직업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윤여정의 작업 환경을 걱정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나에게 김기영, 조영남, 홍상수, 임상수를 모두 거친 백전노장을 걱정해줄 자격이나 있을까? 윤여정이 당시 작업 환경이 힘들었을 뿐 성매매 장면 촬영이 합의하에 있었거나 사전합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납득할 만한 조건에서 진행되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밖에.

하지만 이 역시 당사자가 괜찮다고 말했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건 이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작업 환경과 연결된다. 한국영화계는 여성배우의 착취와 관련된 길고 잔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사람들이 윤여정의 인터뷰와 간담회 녹취록을 이 연장선상에서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죽여주는 여자>의 잠재적 관객은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성매매를 해야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6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도대체 누구겠는가. <애마부인>의 관객들과 겹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를 사전에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작업 환경의 조성과 홍보 모두에 해당된다. 적나라한 섹스신으로 화제를 모았던 <아가씨>는 이 장면을 위해 최대한 밀폐된 촬영장소를 준비하고 꼼꼼한 시나리오에 바탕을 둔 완벽한 리허설로 합을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인터뷰와 보도자료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여전히 이 영화의 섹스신은 여러 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배우에 대한 착취'를 걱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영화 촬영장 역시 삶의 현장이라면 배우와 스태프를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 대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관객들이 영화 외적인 일에 신경쓰느라 내용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그게 작품 홍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만해도 그 성매매 장면을 잡생각없이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소동이 영화의 일부를 망쳐버린 것이다.

‘다들 전문가들이니 알아서 수습하겠지’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죽여주는 여자>의 홍보 과정은 여전히 위태롭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어제 있었던 GV에서 진행자였던 정재승 교수가 이 소동과 관련되어 영화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남혐’이고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이 빠져 있는 중이다. 트위터에 해명글이 올라오긴 했는데,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아니, 거의 10분에 한 번씩 한국 남자들의 다양한 문제점을 비판하고 한국 여성의 위태로운 노년을 집중적으로 파는 영화를 홍보하면서 ‘남혐’과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이렇게 쉽게 쓰면 어떻게 하나. 이건 의도한 자살골인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죽여주는 여자><아수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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