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심한 제목 베끼기에 따른 노골적인 부작용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라는 제목은 불편하고 어색하다. 더 이상 행성을 의미하는 일본식 한자단어 혹성은 거의 쓰이지 않는데, 이것 하나만 영화 제목에 붙어 달랑 남아 있으니 신경 쓰일 수밖에. 아직도 그 사실을 지적하는 트윗이나 댓글이 여기저기에서 올라온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제목을 지은 사람들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 이미 KBS에서는 이 영화의 제목을 [행성탈출]로 고쳐 방영한 적 있다. 하지만 새 제목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영화는 다시 [혹성탈출]로 돌아간다.

제목이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지어놓고 보면 더 이상 만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대충 붙인 제목이 끝까지 관객들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장 피에르 주네의 [Le fabuleux destin d'Amelie Poulain]은 한국어 제목이 [아멜리에]였다. 심지어 본문 자막에서도 그냥 아멜리인 주인공 이름이 제목에서만 아멜리에가 되어 버린 거다. 네 자 제목이면 흥행이 더 잘 된다는 미신 때문이란다. 이 미신 때문에 멀쩡한 주인공 이름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름 아멜리에로 굳어져 버린다. 아, 이 역시 KBS에서 국내 방영 때 그냥 [아멜리]로 고쳐봤다. 역시 이 당연한 이름은 먹히지 않았다.

오역이라도 고치기가 쉽지 않다. 왜 [The Scarlet Letter]가 [주홍글씨]여야 하는가? 왜 [The Red Shoes (De røde sko)]가 [분홍신]인가? 이러다 보니 이 소설들의 제목을 그대로 따라한 한국 영화들을 접한 해외 관객들은 당황하게 된다. 변혁의 [주홍글씨]의 타이틀 크레딧은 주홍색인데, 호손 소설의 진홍색과는 달리, 이 색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당연히 [The Scarlet Letter]인 영어 제목과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The Red Shoes]라는 제목으로 나온 [분홍신]을 본 외국 관객들은 영화 속에 나온 구두들이 ‘핑크색’이라는 것에 짜증을 낸다. 아마 이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본 관객들은 한국인들이 색맹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더 괴상한 건 왜 이들이 [주홍글씨]와 [분홍신]이라는 제목을 달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계에서 이미 잘 알려진 작품의 제목을 카피 하는 건 당연한 습관이 되어 있다. 최근작들만 봐도 [여인의 향기], [반짝반짝 빛나는], [당신이 잠든 사이], [내 사랑 내 곁에] 모두가 카피다. 이 숫자는 드라마 세계의 실장님 숫자만큼이나 병적이다. 영화계도 예외는 아니다. 차태현의 차기작이라는 사극 코미디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다. 제발 말리고 싶다. 다행히도 아직 ‘가제’라니 약간의 공을 들여 새 제목을 찾을 시간은 있다.

왜 이러는 걸까. 업계 사람들은 익숙한 제목으로 관객들이나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하는데, 여기에 의미 있는 통계 연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보나마나 이 변명도 질문이 나온 다음에 졸속으로 만들어냈다가 나중에 그들 스스로 믿어버린 게 뻔하다. 카피 제목의 유용성은 단 한 번도 입증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게으를 뿐이다.

반대로 그 부작용은 노골적이다. 더 이상 한국 연속극이나 영화의 제목은 일회용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세계에 전파되고 끝난 뒤에도 계속 검색어로 남는다. 그렇다면 카피 제목은 우리가 사는 디지털 환경 안에서 일종의 공해가 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를 검색하려 'Open City'를 검색한 사람들은 이상기의 2008년 영화 [무방비도시]의 자료까지 한꺼번에 얻는다. 구글에서 한국어로 ‘무방비도시’를 검색한 사람들은 첫 페이지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 영화에 대한 자료를 겨우 하나밖에 얻지 못한다. 이 정도면 거의 도둑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이제 정보시대를 살고 있고, 정보시대에는 따로 지켜야 할 에티켓과 삶의 방식이 있다. 사람들의 지식 접근을 방해하고 혼란에 빠트리며 남의 노력에 생각 없이 기생하려는 이 게으른 습관은 결코 여기에 맞지 않는다. 어이가 없는 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손쉽기 짝이 없다는 거다. 습관에 끌려가는 대신 그냥 상식적으로만 생각하면 된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혹성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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