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연적 아닌 제2의 남자 김태훈이 남긴 것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JTBC <판타스틱>에서 발연기 탓에 ‘연기고자’란 별명을 얻은 주인공 류해성(주상욱)은 작가 이소혜(김현주)에게 이런 주문을 한다.

“작가님, 로코로코. 멜로멜로.”

사실 류해성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히트맨>은 블록버스터 하드보일드 액션드라마다. 히트맨의 주인공은 과묵하고 표정도 없고 오직 액션으로 승부한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는 멜로를 줘도 눈빛 못 살리고 로코를 던져줘도 달콤한 대사를 맹탕으로 치는 연기고자 류해성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드라마인 블록버스터 <히트맨>과 달리 실제 드라마 <판타스틱>은 로코로코하고 멜로멜로한 드라마의 정석이다. <판타스틱>은 사실 이야기 자체가 아주 새롭거나 드라마의 흐름이 파격적인 건 아니다. 너무 요란하고 화려해서 판타스틱한 작품은 아니고 오히려 멜로와 로맨스가 줄 수 있는 판타스틱한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 탁월하다. 사랑스럽고, 멜랑콜리하고, 가끔은 은은한 감동이 있다.

사실 겉모습만 보면 <판타스틱>은 흔한 멜로와 로맨틱코미디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발연기 배우 류해성과 야무진 방송작가 이소혜의 과거의 오해와 현재에서의 갈등 그리고 연인으로의 발전은 전형적인 로맨스물의 흐름이다. 초반부에 밝혀지는 것처럼 유방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주인공의 삶도 드라마에서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시한부인생을 시작으로 옛 친구 백설(박시연)과 조미선(김재화)을 찾아 다시 우정을 쌓는 흐름 역시 익숙하다.

하지만 <판타스틱>은 이 익숙한 멜로와 로맨틱코미디를 사랑스럽고 신선하게 만들 줄 안다. 류해성과 이소혜의 감정의 흐름을 꾸준히 쫓아가는 동시에 기존의 드라마에서 익숙한 감정변화의 순간들을 색다르지만 인상적인 장면들로 보여줘서다.



특히 <판타스틱>에서 남녀주인공 류해성과 이소혜의 벼락 추락신은 이 드라마의 장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이소혜는 야외촬영지에서 촬영팀과 떨어져서는 홀로 생각에 잠긴다. 암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탓에 강단 있는 그녀도 그대로 주저앉기 일보직전이다. 바로 그때 술 취한 마을 주민이 나타나 이소혜를 위협한다. 이소혜는 뒷걸음질 치다 결국 벼랑 끝에 다다른다. 그 모습을 보고 류해성은 절벽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절벽에서 공기 안전매트 위로 떨어진다. 카메라는 허공에서 두 남녀의 표정 변화, 그리고 매트에서 떨어진 후 처음 편안한 반말로 서로를 걱정하는 두 남녀의 얼굴을 꼼꼼히 훑는다. 마지막으로 높은 곳에서 전체장면을 잡는다. 그렇기에 두 주인공은 침대 위에 누운 편안한 연인처럼 느껴진다.

이 절벽 추락신은 류해성이 처음으로 이소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기도하다. 하지만 이소혜에게 있어서 이 추락 장면은 더 많은 의미들을 내포한다. 물론 과거에 깊은 연인이 될 뻔했던 류해성에게 남아 있는 애정의 흔적을 확인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삶을 놓아버리려던 그녀가 죽음 직전의 상황을 체험한 후 오히려 삶의 의지를 강하게 느끼는 장면이기도하다.



한편 <판타스틱>에는 이 두 사람을 위한 안전매트의 역할을 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판타스틱>이 다른 로맨스물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이 제2의 남자인 홍준기(김태훈)의 힘이 크다. 홍준기는 이소혜와 같은 암 환자이자 그녀의 주치의다.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방랑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의사는 <판타스틱>에서 꽤 도드라지는 캐릭터다.

그런데 삼각관계의 한 축이 될 것 같던 이 남자는 소혜의 감정을 확인한 후 한 걸음 물러서 그녀의 멘토가 된다. 하지만 이후 홍준기의 역할은 그저 그런 삼각관계의 두 번째 남자가 아닌 멘토로서 드라마 특유의 따뜻한 울림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여주인공 이소혜의 연애에 대해 조언해주고, 그녀가 암 환자로 살아가는 삶을 지켜보고 위로하고 때론 꾸짖는다.

그렇기에 류해성과 이소혜의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흘러가면서 시한부의 삶을 사는 홍준기와 이소혜의 휴머니즘 드라마 또한 자연스럽게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 삼각관계가 아닌 두 개의 각기 다른 빛깔의 따스한 울림을 지닌 두 줄기의 이야기가 <판타스틱>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



더구나 홍준기의 역할 덕에 <판타스틱>은 암, 혹은 시한부적인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기존의 드라마가 시한부 환자의 존재를 단순히 극적 코드로 이용한 것과 달리 이 드라마는 시한부판정을 받은 인물의 가치관의 변화들을 섬세하게 뒤쫓는다.

특히 홍준기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채우는 13회 차는 더욱 그러하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우정을 기억하기 위해 홍준기는 장례식 마지막 파티를 준비한다. 한때 사랑의 연적이었던 류해성은 홍준기를 도와 그가 행복한 마지막 삶을 채워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담담하면서도 유쾌하고 아름답게 묘사된다. 시한부 환자의 마지막을 쫓아가지만 너무 감상적이거나 너무 비극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판타스틱>에는 시한부 환자의 마지막을 그릴 때 느껴지는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카타르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인물을 통해 삶을 정리하는 또 다른 방식의 통찰을 보여준다. 시한부의 인물로 우리의 눈물샘뿐만이 아니라 삶과 인식을 건드리는 셈이다. 이 정도면 김태훈이 우리네 드라마 시한부 캐릭터의 새 교본을 만들었다고 평해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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