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용되는 논문, 인용하지 않은 글

[백우진의 잡학시대] 기자의 보람은 자신이 쓴 기사를 많은 동업자가 큰 비중으로 인용하는 일이다. 그런 기사를 특종이라고 부른다. 학자의 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학자는 자신이 쓴 논문이나 저술을 다른 학자들이 받아들여 많이 인용하기를 원한다. 논문이 인용되는 횟수는 학자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다.

기사와 학술적인 글은 모두 사실을 담는다. 기사가 특종이 되려면 파급력이 큰 사실을 맨 처음 보도해야 한다. 학술적인 글 또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영향력은커녕 신뢰조차 받지 못한다. 학술적인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 불가능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없는 다른 자료를 인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용되지 않는 논문은 쓸모가 덜하다. 다른 자료를 전혀 인용하지 않은 논문은 쓸모가 없을 공산이 크다. 자료를 인용하지 않은 채 사실을 왜곡한 논문은 거론할 가치가 없다.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Thing 12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가 인용한 글은 단 두 가지다. 둘 다 장 교수 자신의 책이다. 하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다리 걷어차기』다.

쓰다보면 자신의 책을 인용해야 할 상황이 나온다. 문제는 사실과 관련한 다른 자료를 참고하지 않은 데 있다. 장하준 교수는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조선업을 시작한 배경을 억측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70년대에 한국 정부는 현대그룹의 전설적인 창업주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업을 시작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유명한 정주영 회장마저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당시 독재자이자 한국의 경제 기적을 주도한 박정희 장군이 직접 현대그룹을 파산시키겠다고 협박하자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정주영 회장은 달리 말했다. 정 회장의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 중 관련 부분을 인용한다.

오로지 나라의 경제 발전 외에 아무런 사심이 없었던 지도자 박 대통령의 조선소 건설에 대한 의지와 집념이 나에게 가슴 뻐근한 감동으로 와 닿았다.

회고록에서 박 대통령이 협박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짐작할 정황도 찾을 수 없다. 장하준 교수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은 회고록에서 다시 조선소를 짓기 위해 뛴 에너지를 대통령이 준 ‘감동’이라고 들려줬다. 그게 아니라 ‘협박’라고 주장하려면 장 교수는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장 교수의 오류는 사실에 눈 감은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사실을 왜곡하면서 내놓은 주장이 더 문제다. 이 대목은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다루겠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cobal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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