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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왕’, 영화계가 얼마나 고약한 곳인가에 대한 증거
기사입력 :[ 2016-10-25 13:18 ]


‘걷기왕’, 그들이 종종 느리고 어리석어보일지 몰라도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백승화 감독의 <걷기왕>을 두 번째 보고 놀란 건 이 영화가 정말로 정상적이고 건전한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시사회 때 못 보았던 특별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첫 감상 때 가장 먼저 보였던 건 이 영화의 비정상성이었다. 청소년 스포츠 영화라는 나름 전형적인 장르를 택했으면서 그 모든 규칙과 가치를 깨고 있으니까. 1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스포츠 영화는 많다. 하지만 <걷기왕>은 노력과 도전도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재로 택한 경보라는 종목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보내지 않는다. 이 정도면 작정하고 냉소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걷기왕>의 특별한 매력이고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이 영화의 정상성과 건전함은 비정상성만큼이나 의미가 크고 중요했다. <걷기왕>이 추구하는 정상성과 건전함은 한국 영화계에서 마땅히 일상화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희귀한 가치이다.

우선 기초적인 성비를 보자. <걷기왕>은 극중 중요한 캐릭터가 모두 여성인 희귀한 한국영화에 속한다. 그러니까 몇 년째 계속된 ‘알탕 영화’들에 대한 정상적이고 건전한 대답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이들의 여성성을 과장하거나 페티시화하지 않으며 그냥 자신만의 목표와 고민이 있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제목부터 <걷기의 여왕>이 아닌 그냥 <걷기왕>이다. 아마 제목은 몇 년 전 인디 히트작인 <족구왕>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래도.



영화는 불필요하게 울분을 터트리지도 않는다. 최근 한국 영화들을 지배하는 정서 태반은 억울한 남자들의 울분이었고 이는 대부분 폭력적으로 표출되었다. 그것이 비판적인 의미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폭력이었고 이것들이 모이다보니 반복적인 자극만 남았다. 그러니까 평균적인 한국영화들은 죽어라 억울해하다가 폭발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들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걷기왕>의 주인공들은 종종 느리고 어리석어보일지 몰라도 그 주어진 한계성 속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들은 대화할 줄 알고 자성할 줄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의 궤도를 수정할 줄 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의 소중함을 알며 아무 데에서나 자폭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주제인 것이다. 꿈이나 그밖의 거창한 목표 때문에 굳이 자기가 다칠 필요가 없다는 것. 정말 건전한 말이고 모두가 들어야 하는 소리인데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한국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영화 <걷기왕>은 캐릭터를 존중한다. 이는 작품의 독특한 개성과 연결된다. 앞에서 이 영화는 쉽게 냉소적이 될 수 있는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영화가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들을 수단을 위한 도구로만 쓰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부류의 흔한 영화라면 자기계발서와 <시크릿>의 신봉자인 담임선생은 조롱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캐릭터가 대표하는 고정관념들을 놀려대면서도 정작 캐릭터를 막 대하지는 않는다. ‘슬플 때 힙합을 춘다’는 바이크 총각 역시 놀림감이지만 영화는 그 총각에게도 자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리를 준다. 한마디로 착한 영화인데, 이 ‘착함’이 낯설어 보이는 건 역으로 한국영화계가 얼마나 성미고약한 곳인가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 글을 쓰다가 나는 영화의 보조작가로 참여했던 남순아 감독의 트윗을 보았다. 이 트윗 타래에 따르면 <걷기왕>은 촬영 전 스태프들 대상으로 민우회에서 강사를 초청해 성희롱 예방교육을 했다고 한다. 남 감독은 이 타래에 콘티북에 실린 성희롱 예방교육 매뉴얼의 사진도 공개했는데, 나는 이 정보가 웬만한 인터뷰나 기사보다 더 큰 홍보효과를 올렸을 거라고 믿는다. 우린 모두 우리가 산 상품이 사람들과 동물들을 비교적 덜 착취하고 윤리적으로 만들어졌기를 바라지 않는가? 영화라고 왜 예외가 되겠는가.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다음 글을 추천한다.http://m.ildaro.com/a.html?uid=7636)

최근 며칠간 SNS는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에 대한 폭로로 시끄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도 한동안 새로운 고발자들이 꾸준히 나타날 것이고 우린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넘겼던 세상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길이 있겠지만 난 우리 자신이 일단 자신을 돌이켜보고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길을 가면서 그 길을 자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믿는다. 비정상의 폭력을 몰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상성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걷기왕>의 행보는 본받을만 하다. 우리 모두 밝고 수다스럽고 시끄럽고 우쭐거리는 건전한 정상이 되자.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걷기왕>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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