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전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 사건1. 의식이 없는 50대 남성이었다. 집에서 겨를 없이 나온 듯 실내화 차림에 심각한 표정을 띤 그의 아내는 그가 평소에 먹었다던 수면제의 빈 통을 내밀었다. 그는 그걸 정말로 다 털어넣었는지 아무리 깨워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중략)

나는 그가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다는 연락을 받고 면담을 위해 중환자실로 찾아갔다. 그는 한숨 개운하게 잘 자고 일어났다는 표정으로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가 살아온 반듯한 삶의 결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주치의로서 형식적인 면담을 시작했다. (중략)

“아, 뭐, 그랬었지요. 좀 우울하다보면 그럴 때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요새 통 잠이 안 와서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잠이 안 오니까 생각이 좀 엉키더라고요. 가족들도 있고, 정신 차려야 할 텐데 말입니다.” (중략)

그는 다른 약물 중독 환자들과는 달리 질문에 조리 있게 답했다. 삶에 대한 희망도 보였으며, 이후 치료 과정에 대해서도 순응적이었다. 보기 힘든 얌전한 케이스였다. 면담을 마치니 그를 살려냈다는 약간의 보람도 생겼고, 잠시 감정이 격해졌던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사건2. 아직 40대였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죽기에는 너무 이르고 아까운 여자였다. 게다가 겉으로는 특별한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 그것도 사망 추정 시각이 상당히 오래 전인 상태로, 그래서 살아날 가망도 사라진 상태로.

절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삽관과, 정맥로 확보와, 각종 약물 처치와 흉부 압박이 이어졌다. (중략)

큰아들이 면담을 요청했다. (중략)

“그 새끼, 그 새낍니다. 그 새끼라고요.”

“네? 무슨 소리죠?”

“그 남자요, 그 새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새 아빠란 말입니다.”

당신은 아마 소설가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었고 드라마와 영화를 봤다. 그 상상력으로 이 두 사건이 소설이라면 어떻게 전개될지 생각해보라. 당신이 상상하지 못한 결말을 만날지 모른다.

이들 사건은 응급의학 전문의 남궁인 씨가 전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의 일부다. 삶과 죽음이 순간에 갈리는 전쟁터 같은 응급실에서는 상상의 경계를 멀리 벗어난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 이야기는 대개 끔찍하거나 처절하거나 비참하거나 슬프다. 말로는 자주 “죽겠다”면서도 생활에 치여 지내면서 잊고 있었던 죽음이 그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옆에 다가온다. 의대생 시절 “죽고자 하는 생각이 갖가지로 변형되어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털어놓은 의사 저자의 경험이 바탕이 된지라 죽음의 언저리와 현장을 묘사하는 서술이 생생하다.

남궁 씨는 또한 존엄사 및 안락사, 응급의료를 둘러싼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사망 사고 같은 제도의 문제도 조곤조곤 풀어낸다.

책에 담긴 얘기가 ‘죽음’으로만 엮인 건 아니다. 응급실에서 맞닥뜨리는 ‘세상에 이런 일이’ 류의 기묘한 해프닝이나 에피소드가 더해졌다.



이 대목에서 섬세하거나 예민한 독자는 불편함을 느낀다. 저자는 서문에서 “내가 목격한 사실이 있었고 그 사실을 극적으로 구성하거나 가공하는 작업이 필요했다”고 들려준다. 저자가 환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을뿐더러 사실을 변형했더라도, 해당 환자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가 익명이더라도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것을 꺼릴 것이다. 환자가 고인이 됐다면 그의 가족이 내키지 않아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John Lee 님은 페이스북에 올린 서평에서 “환자의 경험은 신중히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두에서 “호평이야 많은 사람들이 이미 했고 또 인기로도 증명되었으니 굳이 더 하진 않겠다”고 전제한 뒤 “의사의 경험은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의 불행한 인생지분이 들어 있기에 온전히 자신의 것처럼 자유로이 쓸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며 인도계 미국 의사 아툴 가완디가 쓴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을 떠올린 분도 있으리라. 그리고 특수한 질병이나 증상을 앓는 환자의 사례를 전할 때에는 남궁 씨도 가완디 씨처럼 해당 질병이나 증상을 종합적으로 설명해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도 간혹 있겠다.

내 눈길은 저자가 자신의 결심을 적으면서 글을 끝내곤 하는 데 갔다. 저자는 “치명적이었기에, 나는 평생 이 일을 품고 살아갈 것”이라고 하거나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보다도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기로,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고 쓴다. 또 “하지만, 나에게서 모든 게 빠져나가 빈껍데기만 남을지라도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이밖에 “나는 앞으로도 꼭, 이 ‘수고’를 잊지 않을 작정”이라고 들려준다. 일기 형식으로 올린 글과 책으로 묶는 원고는 같을 수도 있지만 달라야 할 때도 있다. 다르게 해야 한다면 언제가 그런 경우인가? 다시 쓴다면 어떻게 달리 쓰면 되나?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작은 의문이다.

John Lee 님은 “이미 평범한 의사라기엔 먼 길을 가버린 그가, 평범한 의사들을 대신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종군기자 역할을 해주기를 주제넘게 기대한다”고 말했다. 의료계를 모르는 주제인 나는 일반인이 모르거나 오해하는 가운데 막히고 엉킨 의료 시스템의 실상을 전해주는 데 그가 적역이라고 생각했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문학동네, JTBC]

[책 정보]
남궁인 지음, 『만약은 없다』, 문학동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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