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도 뉴스도 막장이 된 시대, 예능은 길을 잃고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나보다. 지난 2015년 큰 기대 없이 방영한 흑인 가족 드라마 한 편이 미국 방송업계를 뒤집었다. <모던 패밀리> 등 수년째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던 대형 시트콤을 밀어낸 이 드라마는 한 손에는 힙합을, 다른 한손에는 가족 사업의 후계구도를 놓고 가족끼리 살벌하게 다투는 하드코어 막장을 들고 나와 세상을 제패했다.

이 드라마는 이름도 거창한 <엠파이어>. 2015년 전미 시청률 1위를 기록한 이 힙합막장 가족드라마의 성공가도는 시청률을 넘어 음원차트 석권까지 실로 어마어마했다. 폭스 사는 재빨리 시즌2와 3을 동시에 준비했고, 그 결과 방송이 시작된 지 불과 1년째 되는 지금 세 번째 시리즈가 절찬리에 진행 중이다. 미국에선 큰 화제가 된 막장 가족 드라마는 사실 우리에게는 크게 낯설지 않다. 숱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일일 드라마 및 주말 드라마에 막장 코드가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 벌써 10여 년째. 이제 더 이상 막장 드라마의 유해함에 대한 논의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런데 드라마뿐 아니라 뉴스까지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막장이 일상이 된 세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 한해 예능은 그 어떤 때보다 자극을 주지 못하면서 힘을 쓰지 못했다. 각 채널 및 요일별 대표 예능들은 그냥 한 살씩 더 먹었고, 새롭게 시작한 예능들은 어떤 흐름도 창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가을 개편 방안을 각 방송사 별로 내놓았지만 ‘개편’이란 말을 붙이기엔 너무나 밋밋해 보인다.

가장 적극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한 곳은 KBS다. 예능국차원에서 프로그램의 정체를 인정하며 ‘KBS적이다’라는 말을 듣는 예능을 폐지, 다매체 시대에 맞는 변화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따라서 대대적인 투자를 했지만 어려움을 겪은 <어서옵쇼>와 장수 예능 <우리동네 예체능>을 폐지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새롭게 들어서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단물이 다 빠진 서바이벌 음악예능 <노래싸움>과 유물이 된 인포테인먼트 <트릭 앤 트루>, <구석구석 숨은 돈 찾기>다. 성공 가능성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필요치 않다. 변화에 대한 포부나 새로운 활력을 언급하기엔 애초 설계된 배기량 자체가 너무 낮다.



그나마 색다른 자구책을 마련한 곳은 올해 유일한 지상파 히트 예능 <미운 우리 새끼>를 내놓은 SBS다. SBS가 최근 발표한 가을 개편 안에서 흥미로운 점은 기존의 프로그램 교체 차원을 넘어서서 편성에 변화의 칼날을 댔다는 점이다. 토요일에는 드라마존을 일요일에는 예능존으로 장르별 특화 편성해 주 시청자층을 공략, 시청률을 높이겠다고 한다. 이에 따라 11월 5일부터 주말드라마 <우리 갑순이>가 토요일 밤 8시 45분부터 2회 연속 편성된다. 예능존은 11월 20일부터 본격 시작되는데 <일요일이 좋다 1부>에 <판타스틱 듀오> 대신 월요일 밤의 <꽃놀이패>를 이동 편성하고, 시즌6을 맞은 [KPOP스타 더 라스트찬스]를 원래 주말 드라마 시간인 밤 9시 15분부터 105분간 방송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 편성 실험의 성과를 관찰하기에 실험키트가 그리 좋지 않다. 끝물에 이른 아이돌 서바이벌쇼 프로젝트를 105분이나 편성하고, 월요일 밤에 실패한 <꽃놀이패>를 주말로 가져오는 건 꽃놀이패를 쥔 배팅이라기보다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



시시한 가을은 비단 지상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포맷 개발과 실험정신에 있어 현재 우리나라 예능국 중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받는 JTBC도 힘이 빠져 있긴 마찬가지다. 이번 가을에 내놓은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토크콘서트 계열의 <말하는대로>, 후속 시리즈 <힙합의 민족2>, 관찰 버라이어티 <한끼줍쇼>다. 종합해보면 그동안 펼쳐왔던 포맷과 콘셉트의 실험, 새로운 인물의 발굴보다 유희열과 하하, 이경규와 강호동 등 기존 예능 선수들의 조합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듯하다.

예능은 과거에 비해 수명이 짧아지고 경쟁도 치열해졌다. 게다가 세상이 워낙 자극적이다보니 예능이 자극적인 면에서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웃음을 주고, 한때는 일상을 공감하고 위로했지만 막장의 시대를 맞이해 예능이 가야 할 길을 못 찾고 있다. 미래라 여겨졌던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는 점점 더 의문부호가 늘어나고 있고, KBS처럼 과거로 돌아가 착해지는 것도, SBS처럼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는 것도, JTBC처럼 숨을 고르는 것도 해볼 수는 있지만 딱히 마땅한 길로 여겨지진 않는다. 막장의 시대, 다음 예능 패러다임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과연 누가 <엠파이어>처럼 먼저 발을 내딛을 것인가. 겨울이 오고 있는 것을 이대로 지켜보고 있는 것도 추워서 싫은데, 오늘날의 코드와 조우하는 것은 더욱 암울하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KBS, SBS,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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