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이토록 현실감 쩌는 재난 영화를 봤던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판도라>는 핵발전소 사고를 소재로 한 재난영화이다. <연가시>를 만든 박정우 감독의 영화로, 전작의 주연이었던 김명민, 문정희를 비롯하여 김남길, 김영애 등이 출연하였다. 영화는 대규모 재난영화로서 실감나는 공포와 강력한 가족신파를 내장한다. 가족신파에 대해서는 호오가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영화는 매우 볼만하다. 연기나 연출 등 영화 내적인 만듦새도 좋은 편이지만, 영화 외적인 맥락에서 현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다.

◆ 현실감 쩌는 재난 영화

영화 <판도라>는 4년간의 제작과정을 거쳐 작년에 촬영을 마쳤지만, 투자가 끊기면서 1년 이상 개봉이 지연됐다. 하지만 늦은 개봉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영화 속 상황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위기의식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지난 9월 경주에서는 기상관측 이후 처음으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후 현재까지 550회의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후쿠시마에서 지진으로 인한 핵발전소 사고가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탈핵은 중심의제로 부상하지 못했다. 환경운동가들이 한국의 핵발전소도 사고 위험이 있으며, 일단 사고가 벌어지면 후쿠시마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재난이 발생한다고 강력히 경고했지만, 설마 한국에서 지진이 일어나겠냐는 안이한 인식이 무관심을 불렀다. 하지만 실제로 지진이 일어났다. 핵발전소 사고 역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둘째는 지난 10월부터 청와대 비선실세와 국정난맥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영화 <판도라> 속 핵발전소 사고에 대처하는 국가시스템의 무능과 지휘혼선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대통령을 젖히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인물(이경영)이 캐스팅 당시에는 총리가 아닌 비서실장이었다고 한다. 만약 비서실장이라는 설정 그대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누가보아도 김기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설정이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이처럼 절묘하게 우주의 기운이 영화의 마케팅을 도와준 덕에, 영화는 개봉 1주 만에 200만 고지를 넘어섰다.



◆ ‘핵발전’이라는 판도라의 상자

영화가 시작되면 흑백화면으로 아이들이 핵발전소를 두고 나누는 대화가 나온다. 누군가는 그것을 로봇이라 하고, 누군가는 큰 밥솥이라 하며, 또 누군가는 판도라의 상자라 한다. 로봇은 첨단과학의 결정체임을 뜻하고, 밥솥은 작동원리이자 경제성을 뜻한다. 판도라는 위험을 뜻한다. 핵발전소에 대한 이미지와 본질에 대한 다각적인 은유가 아닐 수 없다. 이 아이들이 자라 모두 핵발전소와 원자력문화관에서 일한다. 이들에게 핵발전소는 일터이자 밥줄이다.

노후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켜야 된다고 시위하는 주민들도 있지만,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원전 덕에 먹고 산다고 말한다. 딱 한사람, 재혁(김남길)만 빼놓고. 그는 핵발전소로 인해 어업이나 관광업이 죽었다고 말하는 반대주민들의 목소리에 동조한다. 수년전 핵발전소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형이 방사능누출사고로 사망한 뒤 위험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보상금으로 장사를 하려다 말아먹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핵발전소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원양어선을 탈 생각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수, 그리고 애인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재난영화에서 그러하듯이, 재혁이 막 그곳을 떠나려 할 때 하필이면 일이 벌어진다. 규모 6.1의 지진이 일어난다. 노후 원전의 냉각수 밸브에 균열이 생긴다. 규모 7에 견디는 내진 설계이고, 철저한 감시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사고가능성이 제로라던 말은 헛소리였다. 물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핵발전소 소장이었던 평섭(정진영)은 노후 원전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보고서로 올린다. 그러나 차단당하고 소장직에서 쫓겨난다. 핵발전소는 기술적인 것을 전혀 모르는 관료들에게 맡겨진 채 사고를 맞는다.

핵발전소의 위험에 대한 보고서는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경제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총리의 말에 대통령은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마침내 사고에 대한 보고를 접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중수소를 누출시켜 압력을 낮춰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 5km 인근 주민들을 먼저 대피시켜야 한다는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시간을 지체하다가 마침내 폭발이 일어난다. 교통 혼잡으로 주민들의 대피도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더 큰 위험을 불러온 것이다.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책임으로 인해 지도력을 상실한 대통령은 총리의 지시를 따른다. 노회한 총리는 진실을 은폐한 채 주민들을 격리하고 언론을 차단한다. 하지만 핵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누출을 외신에까지 은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침내 소식을 접한 지역 주민들은 탈출을 위해 발버둥 친다.



영화 <판도라>는 핵발전소가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날 경우 벌어질 만한 사태를 현실감 있게 그린다. 실제로 고리원전 30km 반경에 34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사고가 벌어질 경우 대피방법이 전혀 없다. 이런 상황임에도 신고리 5,6호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 영화 속에서 핵발전소보다 더 큰 위험으로 등장하는 고준위폐기물인 사용 후 핵연료가 핵발전소 내부수조에 30년째 보관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판도라>는 특별히 위험을 과장하지 않는다. 현실의 조건을 그대로 둔 채, 규모 6.1의 지진이 일어났다는 가정 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매우 합리적으로 추론해서 만든 것이다. 핵발전소 내부의 우왕좌왕과 정부의 무능하고 비민주적인 대처도 현실에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영화 속 대통령은 적어도 자리에는 있으며, 뒤늦게 각성하여 최소한의 일을 한다. 그러나 현실의 대통령은...에휴 말을 말자.



◆ 평범하지만 위대한 시민들

판도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그것은 모든 재난이 쏟아져 나오는 상자인 핵발전을 뜻하는 것이자,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가리킨다. 영화에서 마지막 희망으로 등장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영화에서 국가는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다. 주민들을 체육관에 몰아놓고, 핵발전소가 폭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찰들은 문을 잠근 채 도망친다. 바닷물을 퍼부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핵발전소를 망가뜨리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며 소방작업을 지체시킨다.

그러나 핵발전소 노동자들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위험한 곳으로 들어간다. 부상을 입고 겨우 살아 나왔으면서도 다시 핵발전소로 향한다. 이따위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는 없지만 내 가족과 이웃과 동료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다.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리러 간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사지로 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숭고하다. <명량>에서 이순신의 충(忠)이 왕조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백성들을 향한 충이었듯이, 그들 역시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다.



영화 <판도라>에서 최후의 영웅적 결단을 내리는 이는 평범한 노동자인 재혁이다. 그는 책임을 질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핵발전소에 대한 애착이나 사명감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다만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자로서 그 일을 해낸다. 용기가 철철 넘쳐서 호기를 부리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그가 카메라에 대고 무섭다며 “엄마, 엄마”를 부르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우는 그 모습은 남성 가장의 영웅적인 면모와 거리가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고, 그의 동료들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친구 길섭(김대용)에게 폭약기술이 있었다면 그도 재혁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대통령도 핵발전소장도 소방대장도 아닌 평범한 노동자가 공동체를 구하는 영웅의 자리를 떠맡는 것은 곱씹어볼만하다. 이는 <연가시>에 이은 감독의 선택이자 한국재난영화의 전통이다. 만약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소장(정진영)이 그 자리를 맡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국가가 작동하지 않을 때, 시민들의 연대로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오랜 역사의 경험이다. “이게 나라냐”는 질문이 온 거리를 뒤덮고 있다. 여기서 나라는 썩어빠진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를 감지하고 시민들이 온갖 종류의 깃발과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라 바꾸는 알바” “나라 바꾸는 계집” “나라 바꾸는 퀴어” “나라 바꾸는 장애인” 여기서 나라는 시민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이러한 시민들의 연대와 헌신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판도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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