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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과연 강동원 같은 초월적 영웅이 존재할까
기사입력 :[ 2016-12-29 17:06 ]


‘마스터’, 정의로운 엘리트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마스터>가 순항 중이다. 개봉 1주 만에 300만 명의 관객을 확보하고, 벌써부터 천만 영화에 등극할 것이라는 예측을 낳고 있다. 조희팔 사건을 모델로 삼아 조 단위의 금융 사기사건을 그리는 이 영화는 “건국 이래 최대 사기사건”이라는 카피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무색해졌다며 울상을 내비쳤지만, 사실은 현 시국이 영화의 흥행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오해는 마시라. 영화가 현실의 부조리를 엄청나게 잘 묘사하고 있어서, 충격적인 현실의 게이트에도 불구하고 흥행하고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마스터>는 호화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연출의 빈 구멍이 많다. 영화의 만듦새가 부실하지만, 영화의 무리한 해피엔딩이 현실의 게이트가 안기는 피로감을 삭히는 용도로 요청되기에 흥행 중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럭키><형> 등 가벼운 감동을 위주로 한 영화들이 만듦새와 무관하게 흥행하였음을 상기해보자. <마스터>의 흥행 역시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극장에서까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욕구에 부합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행운이 나쁘지 않다. 문제는 영화의 해피엔딩이 지닌 정치성이다. 영화는 천진난만함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엘리트주의와 조급증을 품고 있다.



◆ 디테일이 부족한 스케치적 묘사

영화 <마스터>의 만듦새가 좋지 않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병헌, 강동원, 김우빈은 물론이고, 진경, 엄지원, 오달수까지 모든 배우들의 호연을 펼치고 있으며, 미술이나 촬영 등도 흠을 잡기 어렵다. 하지만 영화의 서사가 두 단락으로 나뉘면서 중반에 힘이 빠지고, 압축적이지 못한 편집으로 인해 늘어지는 흐름을 지닌다는 단점은 분명하다. 그 결과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상영시간이 2시간 23분이나 되는 탓도 있지만 관객이 등장인물들에게 몰입하기 힘들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오로지 정의롭기만 한 인물이자 엘리트이며 “모든 것을 잘 해서 재수가 없는” 김재명(강동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희대의 사기꾼인 진회장(이병헌)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도 없다. 그는 훨씬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영화는 거리두기를 통해 그에 대한 감정이입을 차단한다. 가령 그의 입에서 “사기꾼들이 너무 많다”는 말이 나올 때, 관객은 웃게 되는데,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사기꾼에 대한 묘사는 감정이입을 막는다.

박장군(김우빈)은 사기조직내부에 있던 자로 김재명의 표적이 되어 프락치 노릇을 하다가 아예 협조자로 돌아서는 자로, 플롯상으로는 가장 감정이입이 쉬운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는 한순간도 그의 내면에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약간 허세스러운 외관을 훑거나, 사기꾼 조직 내부에서 속고 속이는 본세를 보여주거나, 이들을 에워싼 김대명 팀의 수사를 스케치해서 보여줄 뿐이다.



물론 범죄영화에서 감정이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냉철하게 범죄의 얼개를 보여주며,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장르적 완성도를 꾀할 수 있다. 문제는 <마스터>가 다단계 금융사기의 본질이나 범죄 수사의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영화는 조희팔 사건에 대해 관객이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검색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자세한 묘사를 생략하고 진회장의 원맨쇼와 컴퓨터 화면상의 그래픽으로 갈음한다. 서사를 쌓아가기 보다는 이미지로 퉁 치는 식이다. 영화에는 천문학적 사기가 존재할 수 있었던 사회적 토대에 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 대한민국 권력의 구조나 작동방식에 대한 묘사를 건너 뛴 채, 금융감독원장 한명에 대한 로비와 위장된 자살, 뇌물장부의 존재로 정관계 로비에 관한 모든 것을 갈무리한다. 피해자에 대한 묘사도 생략되어 있다. 누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욕망을 가지고 사기에 걸려드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진회장이 도주한 뒤 오열하는 모습만으로 짧게 담긴다.

그 결과 영화를 다 보아도 다단계 금융사기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수조원대로 금액으로 부풀려졌는지 알기 어렵다. 또한 지능수사팀의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기 힘들다. 모든 것을 영화는 표피적으로 다루면서, 범죄조직 내부의 뒤통수치기를 흥미롭게 따라갈 뿐이다. 빛 좋은 개살구 식의 범죄묘사는 후반부로 가면서 다소 개선된다. 진회장 일당이 필리핀으로 도주하여 벌이는 지역개발사업과 결탁한 사기행각과 국제 자금세탁 과정에 대한 묘사는 나름 디테일하다. 하지만 중반까지 이러한 노력이 결여된 탓에, 영화의 만듦새를 호평하기 어렵다.



◆ 죄악에 물들지 않은 엘리트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러한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마스터>가 흥행하는 이유는 뭘까. 영화가 대놓고 표방하는 카타르시스적 결말이 관객들에게 환대받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로운 엘리트에 의한 거악의 철폐에 관객들이 환호한다는 뜻인데, 이러한 환호가 품고 있는 정치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김재명이 왜 정의로운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영화가 설명하는 것은 그가 줄곧 수석을 한 인재이고, 사법고시 출신의 엘리트 경찰이라는 점이다. 아무런 사연도 결핍도 없다. 그는 한 순간도 의심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수오지심)을 지녔으며, 그저 사기꾼 하나를 처벌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높은 권력자의 비리를 파헤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시비지심)을 지닌다. 마지막에는 법의 테두리에 갇히지 말고 피해자들을 우선 구제해야 한다는 측은지심까지 보여준다. 그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그가 한국 사회라는 토양에서 교육받고 경쟁을 통해 선발되었으며 한국의 경찰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 맞을까.

그는 현실의 존재와 거리가 먼 것은 물론이고, 한국 장르영화의 주인공들과도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공공의 적><추격자><베테랑><내부자들> 등에서 보았듯이 흔히 한국 장르영화는 악과 차악의 대결로 그려져 왔다. 나도 대충 나쁜 놈이지만, 너처럼 진짜 나쁜 놈은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이다. <아수라>는 악과 차악의 구분조차 무의미한 거대한 지옥에서의 공멸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깨고 <마스터>는 선과 악의 구도를 보여준다. 그는 죄악에 물들지 않은 엘리트로서 피해자들을 구제한다. 그가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명하는 과정은 다루어지지 않는다. 가령 <베테랑>의 형사가 탱크로리 기사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지 않은, 아들 키우는 아버지’로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중요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마스터>에서 김재명과 피해자들은 공감의 동일 선상에 놓이지 않는다. 그가 피해자를 구제해야 된다고 느끼는 이유는 공감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의 사도’이기 때문이다. 즉 피해자들이 그의 수오지심과 측은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김재명이 구제하기 전까지 누구의 도움이나 스스로를 구제할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진회장과 한패인 변호사(오달수)에게 또다시 사기를 당할 상황에 내몰려 있었다. 그들은 속수무책의 어린 양, 가련하거나 어리석은 개·돼지이다.

김재명이 검은 머리 외국인의 신분을 가장하여 진회장의 뒤통수를 치는 장면은 흥미롭다. 이는 그가 국제자금세탁을 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과 치환될 정도로 동일한 위상에 놓여있음을 암시한다. 나쁜 엘리트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 맞서 민중을 구원해내는 착한 엘리트의 서사. 어쩌면 <마스터>는 <홍길동전>이나 <슈퍼맨> 보다 더 황당한 영웅담이 아닐까. 적어도 홍길동은 서출이라는 신분사회의 치명적 결핍을 지니고 있고, 슈퍼맨은 크립톤 행성에서 왔다는 초월적 맥락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반해 김재명이 초월적 영웅으로서 민중을 구원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



◆ 영웅서사와 카타르시스가 은폐하는 것

“나 같은 또라이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느냐?” 영화는 이 말로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갈음한다. 물론 또라이는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또라이가 마음껏 수사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경찰청장의 존재이다. 그는 캐릭터랄 것이 없으며, 기능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니 그를 경찰조직의 제유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검찰이나 사법부는 썩었지만, 경찰은 특별히 깨끗하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아니다. 그보다는 어느 조직에나 김재명처럼 희귀하지만 선한 엘리트가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또라이가 정의를 실현하고자 할 때 조직은 지원하거나 적어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지금까지 수많은 적폐가 쌓여온 것은 김재명 같은 또라이(특별한 개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또라이가 나타날 수 없거나 나타나더라도 그 즉시 사장시키는 구조에 원인이 있다. 즉 영화 <마스터>는 천진난만하게 김재명이라는 정의의 사도를 내세우지만, 이를 통해 정의의 사도가 나올 수 없는 구조적 병폐를 은폐한다. 또한 김재명이라는 한 사람의 엘리트가 부각되는 동안, 그에 의해 구제받는 피해자들은 시혜를 받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된다.



영화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은폐하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처럼 그의 뇌물장부가 공개되면, 그 즉시 수뢰자들을 일망타진하는 효력이 발생할까. 박연차 리스트, 성완종 리스트 등이 있었지만, 진실은 밝히려는 세력과 은폐하려는 세력 간의 힘의 균형에 의해 선택적으로 밝혀진다. 이미 진실공방이 끝난 테블릿 PC를 두고도 음해가 계속되는 것에서 보듯이, 진실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발휘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게 아니라면 박근혜와 관련된 진실들은 왜 그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걸까. 검찰이 하지 못했던 수사를 특검이 할 수 있게 된 것도 힘의 균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특조위가 밝히지 못한 진실을 제2의 세월호 특조위가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뇌물장부를 확보하고도 진실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이 지겹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뇌물장부 입수를 곧바로 정의실현으로 믿고 웃으며 끝나는 영화의 순진무구함을 지지하는 것이다.

현실의 고통이 없다면 영화의 허술함은 훨씬 많이 지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아무리 디테일하게 그려도 현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아직 누리고 있지 못하는 해피엔딩의 달콤함을 미리 맛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영화의 카타르시스를 지지할 수 없다. 선한 엘리트에 의해 수동적인 피해자들이 구제되는 엘리트주의 정치학에 동의할 수도 없고, 빨리 승리의 축배를 들고 발 뻗고 자고 싶은 조급함에 동조할 수도 없다. 촛불시민들이 열어젖힌 광장의 에너지를 곧바로 대선의 지지율로 환전하려는 정치인들을 보라. 백마 탄 초인은 오지 않는다. 건국 이래 최대의 사기꾼들이 빼앗아 간 돈들이 국고로 환수되어 진짜로 내 통장에 꽂히는 그날까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마스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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