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 ‘개념녀’는 어떻게 ‘악녀’가 되는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여교사>는 치정극의 외피 속에, 계급과 욕망에 대한 치졸한 틈새를 드러내는 심리극이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은 좋지 못하다. 이는 영화의 만듦새가 나빠서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기대와 실제 영화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파격적인 영화로 소개되는 탓에, 노출이나 정사 수위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나 선정적인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인 이유는 표현의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다루는 욕망의 발칙함 때문이다.

또한 영화는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로,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을 그린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여성영화와 결을 달리한다. 심지어 여성들끼리 경쟁하고 질투하는 서사가 언뜻 ‘여성의 적(敵)은 여성’이라는 반여성적 구도를 취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요컨대 야한 영화를 기대한 사람에게도, 여성영화를 기대한 사람에게도 실망감을 안기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치졸하고 뜨악한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광의의 여성 영화로 곱씹을만하다. 특히 결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데, 영화는 <해피엔드><사랑니><파주> 등이 그러하듯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미처 깨닫지 못한 무의식을 누설하는 영화로 손꼽을 만하다.



◆ “정식 선생도 아닌 게.”

영화 <여교사>는 기간제 교사인 효주(김하늘)의 상황을 통해,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자행되는 차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통을 느끼는 교사가 꼭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여교사들 사이에서 신임을 받는 효주이지만, 그를 대하는 교감선생의 눈길은 냉랭하다. “난 또 애라도 받을 수 있는 줄 알았네.” 임신하면 사직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다음 학기 교사정원이 줄어든다는 말 한마디로 온갖 부당한 일을 떠맡긴다. 생활지도라도 할라치면 “정식 선생도 아닌 게.” 라는 학생들의 빈정거림이 돌아온다.

차별과 모멸에 시달리다 집에 오면, 작가인지 백수인지 알 수 없는 십년 차 애인은 하루 종일 빈둥대다 밥을 달라고 한다. 그래도 잘 버티면 내년엔 정교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살아가던 효주에게, 이사장 딸인 추선생(유인영)이 하나 뿐인 정교사 자리를 꿰차고 나타난다. 대학후배인 추선생은 효주에게 살갑게 굴지만, 그럴수록 효주는 추선생이 싫다.



그런 효주에게 체육관에서 잠든 발레 특기생 재하(이원근)가 잠결에 키스를 한다. 당시에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효주의 뇌리에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남았을 것이다. 며칠 후 효주는 재하가 멀쩡한 약혼자도 있는 추선생과 정사를 나누는 것을 보게 된다. 효주는 모든 것을 가진 추선생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놓인다. 그러나 효주는 추선생을 야비하게 협박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한다. 추선생의 분별없는 옷차림을 선배이자 동료교사로서 타일렀듯이, 도덕적 우위를 점한 채 재하와의 관계를 자제시킨다. 그리고 재하에게 교사로서 도움을 준다.

하지만 효주의 행위 속에 재하를 향한 욕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재하를 자신의 집에 재우게 되었을 때, 애인의 원색적인 욕설에 굳이 변명하지 않는 것은 재하를 남자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하에게 애인의 옷을 입히고, 커튼을 새로 다는 효주의 모습은 재하를 통해 새로운 섹슈얼리티와 활력을 찾았음을 드러낸다. 효주에게 “고마운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재하가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화 <여교사>는 이 장면까지 효주가 재하에게 선생으로서 도움을 줌과 동시에 애정을 쌓아가는 것처럼 관객이 믿게끔 한다. 그리고 콩쿠르대회를 기점으로 반전을 펼친다.



◆ 자멸인가 복수인가

재하가 효주와 가깝게 지낸 것은 추선생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효주는 재하를 지렛대 삼아 추선생에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추선생의 기획에 의해 효주는 농락당하고 있었다. 효주는 도덕적으로는 물론 성적으로도 완전히 패배하였다. 재하는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로 효주가 자신을 통해 선생으로서의 도덕적 자기만족과 성적 쾌락을 탐닉하고 있었음을 교묘하게 꼬집는다. 더욱 나쁜 것은 재하와의 관계로 추선생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반면, 자신은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결국 효주는 모두가 보는 운동장에서 추선생에게 무릎을 꿇고 빈다. 모든 것이 다 내 열등감 때문이었다고 실토하면서.

알량한 기간제 교사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모멸감을 견디며 추선생의 하녀가 되기를 받아들인 효주. 그러나 추선생이 재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비웃어버리자, 분노가 비등점을 넘어선다. 우발적인 분노로 사고를 친 뒤 효주는 그 자리로 재하를 부른다. 추선생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 재하를 부르는 효주의 태도는 방금 살인을 저지른 사람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효주는 왜 굳이 재하를 불렀을까. 첫째는 추선생이 비웃었던 자신과 재하 사이의 감정을 재하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하는 가장 비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효주가 오인했던 감정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확인해준다. 그렇다면 이제 효주는 재하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재하가 추선생의 시체를 발견하고, 추선생의 살인혐의를 덮어씀으로써 파멸하는 것. 이것이 효주가 사건현장으로 재하를 부른 두 번째 이유가 아닐까.

효주가 추선생을 죽이고, 그 자리로 재하를 부른 것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성적으로 패배한 여자의 자멸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과 욕망을 짓밟고 조롱한 이들에 대한 자기 완결적 복수가 아닐까. 성폭행하듯 성기를 밀어 넣는 재하를 받아들이는 효주의 무표정한 모습은 혼돈으로 인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사건현장에 정액을 흘리게 만드는 영민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마지막에 학교로 달려오는 경찰차는 효주가 아니라, (추선생의 폰에 남겨진 메시지를 보고) 재하를 체포하러 오는 것이고. 그렇게 본다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먹는 효주를 비추는 영화의 결말은 체념이 아니라 기묘한 활력으로 일렁인다.



영화는 <로망스><동갑내기 과외하기><신사의 품격> 등을 통해 가장 친숙한 교사의 얼굴을 맡아 왔던 김하늘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표정을 뽑아내면서, 역설적인 긴장을 자아낸다. <여교사>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해피엔드>이다. 농밀한 섹슈얼리티를 지닌 격렬한 치정극임과 동시에 (외환위기 이후) 실업이나 (비정규직) 차별 등 사회경제적 풍경을 비춘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지닌다. 그러나 성정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교사>가 훨씬 진보적이다. 혼외정사를 즐기던 여성이 남편에게 살해되고, 정부가 살인누명을 쓰며, 남편은 아이를 키우며 살게 되었다는 결말을 해피엔드로 규정했던 <해피엔드>에 비해 <여교사>의 이데올로기는 한결 여성 주의적이다.

십년간 하릴없는 애인을 돌보며 ‘개념녀’처럼 살아가던 여성이 어리고 단단한 소년의 몸을 통해 섹슈얼리티에 눈 뜨고, 완전히 잊고 살았던 교사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지만, 이러한 감정과 자기존엄이 부정되자, 악녀처럼 복수해버린다는 서사는 호쾌하다. 무엇보다 미소년의 육체에 홀리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이처럼 당연하게 긍정한 영화가 또 있었던가!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까운, 발칙하고 도발적인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여교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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