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중, 단 2회 만에 ‘역적’을 기대작으로 만들다

[엔터미디어=정덕현] “우리 길현 어매, 길동이는 손가락 빨렸어도 도련님한테는 젖 물렸고, 우리 길현이는 도련님 대신해 숱하게 매 맞으면서 커들 않았서라. 내는 이날 이때까지 나리 모시느라고 허리 한 번 못 펴봤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이 집에 뼈며 살이며 힘줄까지 발라 바쳤는데... 아녀 아녀 나리 잘못이 아녀. 다 내 탓이여. 나리가 뭔 잘못이 있겄어. 온통 노비들은 인간이 아니라고들 하는데 나리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겄어... 어째서 그 때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잉.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싹 다 죽여뿔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워째 못했을까잉.”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아내의 죽음에 아모개(김상중)는 드디어 사태를 깨닫고 각성한다. 자신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이 지옥 같은 노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그는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의 주인인 조참봉(손종학)을 향해 낫을 든다. 그에게 ‘아모개’라는 이름을 지어준 조참봉에게 그는 “이름을 고 따위로 지어 놓으니께 아모개는 아무케나 살아도 되는 줄 알았냐”며 끝내 분노를 터트린다.

남다른 힘을 가지고 태어난 길동이(이로운)에게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힘을 보이지 말라고 당부하는 아모개는 결국 자신 역시 화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왔던 그 힘을 꺼내 보인다. 그는 길동에게 애기 장수 이야기를 해주며 천인이 힘을 보이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모두 죽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억누르고 누르며 살아왔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노비를 아모개라 이름지어버리고 아무렇게나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적>이 그리고 있는 세상은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노비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며 심지어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워 목숨을 거둬가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 양반들의 세계다. 그들은 노비들이 가진 것들을 죄다 빼앗는 도적들이지만 이 이상한 세상에서는 그것이 전혀 죄가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 양반들은 좀 더 높은 신분에 오르기 위해 수탈한 것들을 더 높은 이들에게 상납한다. 이 수직적 수탈 체계의 끝은 왕이다. 왕의 뒤에 서서 권세를 잡기 위한 줄서기는 그래서 끝없이 아래쪽을 착취하는 일로 이뤄진다.



다른 한 세계는 양반들에게 재물을 눈앞에서 빼앗겨도 그게 전부 “주인님 것”이라고 피눈물을 토하며 얘기해야 하는 세계다. 아모개 역시 양반들의 재물을 도적질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도적질이 된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온 가족이 죽을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는 이 이상한 세상. <역적>은 이 두 개의 세계가 부딪치며 누가 진짜 도적이고 역적인가를 묻는 드라마다.

단 2회를 보여준 것뿐이지만 <역적>이 갖고 있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온 몸으로 연기해 보여준 김상중의 존재감은 칭찬 받을 만하다. 사실상 그의 역할은 <역적>에서 힘을 갖고 있지만 힘을 드러내지 못하는 길동이 그의 비극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각성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극이 앞으로 나가는데 있어서 그 밑바탕이 되는 민초들의 분노 같은 정서를 깔아두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역할이 중요했던 건 이 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이야기를 왜 지금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미친 듯이 연기해낸 아모개라는 한 노비의 초상은, 가족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들끼리 벌이는 ‘도적질’에 의해 나라는 갈수록 피폐되고 서민들의 삶은 더더욱 힘들어진 현재에 더 큰 울림을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실을 각성한 아모개의 절규는 이름 없이 묵묵히 성실하게만 살아왔던 많은 대중들을 공감시킨다. 바로 이 아모개의 연기를 통해 김상중은 단 2회 만에 <역적>을 기대작으로 만들었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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