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미개봉작 <언씽커블>

[오동진의 새영화가이드]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테러전이 확대되자 당시 이집트 정보군 책임자였던 술레이만(현 부통령, 무바라크 자진 사퇴 후 임시내각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국민과 법의 감시를 피해 행해야 하는 은밀한 작전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과 유럽 등에서 체포,납치한 테러 혐의자들을 수사할 때 미국 정부는 이들을 미국이 아닌 이집트로 보내 취조받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미국이나 미국 점령지에서는 사실상 고문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이라크 아부그라이브는 그래서 문제가 됐다) 이를 이집트 정보부가 대신 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슐레이만의 잔혹성은 이때 최고조를 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 ABC 방송은 최근, 지난 2002년 미군이 이라크에서 알 카에다 조직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명인 알 자와히리를 사살한 후 신원확인을 위해 술레이만에게 당시 이집트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자와히리 동생의 DNA샘플을 요구한 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때 술레이만은 단순한 샘플이 아니라 한쪽 팔 전체를 잘라 보내 미군과 CIA당국 조차 그 잔혹성에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인물이 과연 현 이집트 민주화 과정을 순탄하게 이끌 수 있을까. 그런데 그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일 수 있다. 미국 오바마 정부가 현재 슐레이만의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미국이 취하고 있는 중동정책의 이중성, 그 내면의 추악성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는 종종 현실을 완벽하게 모사해 낸다. 그레거 조단 감독이 만들고 성격파 배우 사무엘 L.잭슨과 <매트릭스>의 여주인공 캐리 앤 모스가 주연을 맡은 2010년 영화 <언씽커블, Unthinkable>은 지금과 같은 테러리즘 시대에 있어 슐레이만식의 고문과 그 정당성 혹은 그 반대로 고문이 갖고 있는 비인간적 잔혹함에 대해 극단적 논쟁의 불을 붙이는 영화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9.11 이후의 시대에 있어 과연 정치적, 사회적 정의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같은 생각을 만드는 영화의 과정’이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작품들보다 심적인 고통을 크게 느끼게 한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고문의 장면들을 러닝 타임 내내 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기본이고 손톱을 후벼 파내고 이빨을 갈아낸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이 정부 당국의 묵인 하에 합법적인 수단으로 정당화되는 모습도 극악하기 이를데 없다.

이는 오로지 핵폭탄을 찾아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데 아무리 다수의 생존을 위한다지만 또 다른 소수는 이렇게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일단의 극단론자들 때문에 수십만,수백만의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은 또 과연 옳은 것인가.



이름을 이슬람 식인 유스프 아타 모하메드로 바꾼 미국인 스티브 아서 영거(마이클 쉰)는 어느 날 미국 정부에 자신이 직접 녹화한 테이프를 보낸다. 테이프에는 영거가 수백만명을 살상할 수 있는 핵무기 세 개를 각각 다른 지역 세 곳에 설치해 놓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FBI 요원 헬렌 브로디(캐리 앤 모스)는 영거를 체포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인 H(사무엘 L.잭슨)를 만나게 되고 곧 이 H와 함께 이미 군 당국에 의해 체포된 영거를 심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헬렌은 심문 과정에서 H가 고문 기술자, 그것도 정부가 은밀히 보호해 오던 끔찍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경악한다.

제목이 왜 ‘언씽커블’, 곧 ‘생각할 수(조차) 없는’인지는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단순히 잔인하고 잔혹한 고문의 장면들이 이어져서가 아니다. 고문 기술자 H는 영거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아니 어쩌면 그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우리가 익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 그는 결국 영거의 앞에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데, 그 대상이 상상하기 힘들 만큼 끔찍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잔악해질 수 있는 가를 보여준다.

문제는 H가 아니다. H의 그 행위들을 방조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척 하는 주변의 인물들이다. 비인간적 고문 행위에 끝까지 저항하려는 헬렌 브로디 또한 그 같은 비판과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극중에서 그녀는 여러 번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다. 마치 자신의 손에는 피가 안묻었다는 양. 그녀는 H와 그의 행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사람들이 죽는 게 나아. 그게 더 인간적인 거야!” 하지만 그녀도 영거가 핵폭탄 세 개와 함께 별도로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의 폭발로 수십명이 희생되자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한다. 헬렌은 영거의 가슴을 칼로 그으며 핵폭탄의 장소를 말하라고 강요한다.

스티브 아서 영거는 유스프 아타 모하메드로 이름을 바꾸기 이전, 미국 핵무기 전담밤 요원이었다. 그는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테러리스트로 돌변했을까. 하지만 <언씽커블>은 정치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영거의 정치적 태도나 영거와 같은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하는 미국 정부의 중동적책에 대해서는 심도깊게 논의하지 않는다. 대신 그 정치적 태도들이 빚어 낸 어처구니 없는 비극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지금의 미국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의 중동은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 우리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언씽커블>은 우리 스스로의 현재적 자화상이 어떤 형상인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지난 해 미국에서도 극장개봉에 실패하고 DVD로 직행했다. 국내에서도 영영개봉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아예 <언씽커블>은, 정치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의 이유로 개봉될 수가 없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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