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피고인’·‘김과장’, 제목만 봐도 시대정서가 보인다

[엔터미디어=정덕현] 우리는 ‘역적’이거나 ‘피고인’이고 혹은 ‘김과장’이 아닐까. 최근 뜨는 드라마들의 제목을 보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의 시대정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MBC 월화드라마 <역적>이 그려낸 비참한 노비들의 삶이 그렇고,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이 보여주고 있는 억울함과 죄책감에 휩싸인 채 그 기억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이 그렇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출퇴근하지만 알고 보면 가진 자들의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치부 속에 소모품 취급당하는 KBS 수목드라마 <김과장>의 샐러리맨들 역시.

<역적>의 아모개(김상중)라는 노비가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건 죽어라 주인을 위해 일해 왔건만 돌아온 건 아내의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 온 이 땅의 가장들이 작금의 현실에서 느끼는 허탈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그래서 아모개가 각성하고 잘못된 현실을 하나하나 바꿔나가며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지금의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아가 아모개가 익화리라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반상의 차별이 있는 수직적 체계의 현실에서 벗어나 ‘동무와 형제’라는 수평적 관계로 이상적인 세상을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어떤 전망 같은 것을 보게 만든다. 결국 가족을 위해 이 일을 시작했던 아모개는 이로써 그 가족의 범주를 익화리라는 마을의 이웃으로까지 넓히게 되고 이건 앞으로 등장할 홍길동이 ‘백성의 마음을 훔치는 도적’이 되는 이유가 된다. 결국 그 가족의 범주는 백성으로까지 나가게 된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피고인>의 박정우(지성) 검사가 환기시키는 현실은 지금 현재의 대중들이 느끼고 있는 이른바 ‘피고인’ 정서다.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아오기만 한 것 같은데 어느 날 자신이 그 가족을 모두 죽게 했다는 억울함과 죄책감 사이에서 느끼는 고통. 시대의 ‘피고인’이 된 듯한 그 느낌은 아마도 죄 없는 아이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걸 목도한 이 시대의 어른들이 모두 공유할 정서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 박정우가 갇혀 있는 그 ‘기억의 감옥’에 갇힌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든 그 감옥을 벗어나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너무 힘겨워 기억마저 지워버린 그 들여다보기도 힘든 현실들을 마주해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그 진실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감옥은 결코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김과장>의 김과장(남궁민)이 처한 상황은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정서를 자극한다. 회사는 거대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고 그러다 비리가 드러나게 되면 담당 샐러리맨을 희생양으로 내거는 현실. 그래서 그가 희생되고 나면 다른 희생양을 그 자리에 세우는 현실. 이 땅의 많은 김과장들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김과장이 결코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를 희생시키려 했던 많은 비리의 진짜 ‘머리들’을 법정에 세우기를 바란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은 일일 게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낸다. 주인공인 김과장이 어떤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그저 소시민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그 일이 우연히도 상황을 뒤집어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블랙코미디 설정은 그래서 오히려 현실을 과장함으로써 잠시나마 드라마를 보는 시간만큼의 통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어쩌다 ‘역적’이거나 ‘피고인’이거나 혹은 ‘김과장’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원해서 그렇게 됐던 게 아니다. 잘못된 시대가 우리를 그렇게 몰아갔다. 드라마는 그래서 그 잘못된 현실들을 어떻게 깨쳐나가는가를 우리 앞에 이야기로서 펼쳐놓는다. 그런 이야기라도 없다면 어떻게 이 답답한 현실을 버텨내겠냐며. 우리가 이들 드라마에 열광하게 되는 이유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SBS,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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