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술집’, 시청자도 함께 취할 거란 환상을 버려라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예전 스포츠신문의 전성시절, 매체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취중토크를 콘셉트로 삼는 인터뷰 코너가 있었다. 스타와 기자가 법인카드로 마련한 술자리에서 한 잔의 술과 함께 나눈 대화라는 진솔함을 내세웠다. 그래봐야 가십성 인터뷰였지만 당시는 지금보다 연예인의 일상이나 무대 밖 모습을 접하기 힘들었던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만의 독점적인 지위가 있었다. 빠듯한 스케줄 사이에 촘촘하게 20~30분 나누는 기계적인 인터뷰나 풀메이크업을 하고 스튜디오나 촬영장에서 나누는 홍보성 인터뷰에서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모습과 이야기가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TV예능에서 이와 똑같은 콘셉트의 토크쇼 <인생술집>이 방영 중이다. 역시 술 한 잔 앞에 편안해지는 진솔함을 앞세운다. 복귀한 ‘말발’ 좋은 탁재훈에 술과 음식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신동엽과 김준현이란 핫한 MC를 동시에 투입했다. 지난 2일부터는 시청등급을 19금으로 상향 조절해 보다 진솔해졌다고 자평하고, 한층 어린 세대의 에릭남을 투입하고 아이돌도 게스트로 모시면서 타깃 시청자의 폭도 넓혔다. 그럼 이제 봉인은 해제된 것일까?

그런데 진짜를 보여주겠다고 술집에 둘러앉았는데, 가짜 택시에 탄 것보다 더 거리감이 멀게 느껴진다. 음주방송이 거북하거나 전위적이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일상과 예능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흐름상 밥상에서 술상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맞는 것 같고, 신동엽은 가끔 발음이 샐 정도로 기분 좋은 취기를 띠는 데 나름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술, 음주방송이 아니다. 방송이 술을 너무 믿은 탓이다. 술을 나누면 편안하고 진솔해질 것이며, 그런 분위기에 시청자들도 젖어들 것이란 막연한 기대와 환상이 빚어낸 어려움에 갇힌 것이다.



사실상, 술과 안주가 놓인 술상만 걷어치우고 나면,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예전 <힐링캠프>와 다를 바가 없다. 술 한 잔만 놓으면 기존 방송과 다른 격식과 긴장을 벗어놓는 토크가 이뤄질 줄 알았지만 현재 방송 중인 토크쇼 중에서 이 술자리만큼 규격화된 쇼는 <해피투게더>밖에 없다. 한 명의 게스트에 집중해 이야기를 묻고, 노래를 청하고, 게스트의 건배사, 퀴즈, 주제별 에피소드 풀어내기 등 진행되는 이야기는 실제 술상의 모습이 아니라 방송 스튜디오에서 본 그림이다. 이번 주 게스트였던 유준상에게 뮤지컬 관련 에피소드를 재연을 곁들여 듣고, 뮤지컬 안무와 아이돌 군무의 차이점에 대해 비교하는 이야기는 굳이 술이 없어도 모든 토크쇼에서 다루는 단골 주제다. 요섭에게 물어본 아이돌 생활과 회사 설립 관련 이야기도 <뭉쳐야 뜬다>에서 커피마시며 나눈 두준의 이야기가 한층 더 깊고 길었다.

최초로 음주방송을 표방한다면 그 기대에 걸맞은 뭔가가 있어야 한다. <인생술집>은 인생의 깊이, 성적 농담, 정치사회적 견해나 격렬한 갑론을박까지 19금 음주방송이 주는 기대를 어떤 층위에서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술자리 19금 대화를 자꾸 내세우지만 ‘몽정’ 등을 논하는 수위는 <마녀사냥>의 17% 정도다. 아직도 나누기 조심스럽다는 정치 이야기, 사는 이야기는 같은 시간 옆 채널에서 물 한 잔 놓고 뜨겁게 나누고 있다. 음주방송임을 내세우지만 <인생술집>이 현재 담고 있는 토크와 추구하는 진솔한 인간미는 술의 힘을 빌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이다. 일본 영화에 나올법한 퇴근길 동네 단골 이자카야에서 들려 나마비루 한잔하며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지만 굳이 방송 스튜디오를 두고 연남동까지 갈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인생술집>이 술을 통해 진솔함을 추구하는 것은 찾아온 손님들이 진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아마도 이 쇼의 차별화된 재미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전략은 <인생술집>의 결정적인 문제와 마주한다. 매주 다른 손님을 받지만 술자리의 취기를 통해 드러내는 ‘진솔함’이 너무나 전형적이다. 누가 오든 반전 매력, 솔직담백한 이야기, 털털한 모습, 쿨하고 당당한 태도 등등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똑같다. 게다가 그 밝은 조명과 일군의 스텝들 앞에서 풀메이크업한 이들의 술자리에 진정성을 느끼고 흥미를 보이기에는 이미 연예인의 일상적인 모습을 만나는 통로가 다양하다.

인생과 술, 좋아하는 사람과의 기분 좋은 시간과 삶의 위로 등등 물론 통용되는 이야기다. 술에 대한 관대함, 술자리의 무르익은 분위기를 풍류로 그리는 우리 사회의 낭만적인 음주 문화를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다만, 술자리가 예능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작진은 그동안 터부시됐던 부분을 도전하고 있다며, 그동안 방송에서 느꼈던 답답했던 부분을 긁어주고 싶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나누는 인생, 사랑, 시국 이야기를 가감 없이 방송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같이 술 마시면서 얘기 나누는 공기가 원활하게 전달되지 않는 이유는, <인생술집>이 추구하는 진솔함은 술상과 술잔의 유무와 전혀 상관없이 모든 토크쇼가 이미 내세웠던 수준이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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