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항쟁 30주년, 반드시 숙고할만한 영화 ‘보통사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보통사람>은 1987년 민주화항쟁을 정면으로 관통하는 영화이다. <보통사람>은 대단히 밀도 있는 솜씨로 당대를 재현해내고, 87항쟁의 문제의식을 복원해낸다.

30년이 지난 지금, 당시를 회고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투사의 관점에서 영웅담을 구사하며 ‘세대부심’을 느끼게 하거나, 당대의 악은 현재와 무관하며 그래서 좋은 시절이 오지 않았냐는 관점을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역자의 자의식을 불러내며 시대와 공모해온 비겁함을 성찰케 한다. 그리고 당대의 악이 현재까지 청산되지 않았음을 한 인물의 뚜렷한 도상을 통해 일깨운다. 87항쟁 30주년이 되는 올해에 적확하게 도착한 영화이자, 영화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한 텍스트라 할만하다.

◆ 누가 보통사람인가?

영화가 시작되면 거리의 시위소리와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라는 포크 송이 흘러나온다. 다들 아시는가?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도 북한을 지칭하는 것 아니냐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었다는 사실을. 1980년대는 냉전의 논리와 체제경쟁이 상존했던 시기이자, 국가발전의 아젠다가 지배적이던 시기이다. 운동권은 독재타도를 통해 민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품었고, 정부는 경제개발을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짧은 오프닝 후 <보통사람>이라는 타이틀이 뜨는데, 사람의 시옷자가 사람인(人)자로 보이도록 한다. 요컨대 영화는 ‘사람’에 대한 특별한 강조점을 지닌다.

사람, 그것도 보통사람. 누가 보통사람인가? 영화는 곧바로 보통사람의 표준에 해당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가장 평범한 소시민의 얼굴을 한 손현주의 몸을 입고 등장한 성진은 청량리 경찰서 형사이다. 첫 등장부터 경찰서 앞마당의 개에게 한소리를 하고, 복도에 들어서면서 데모하다 끌려온 듯한 사람들을 머리를 툭툭 때린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신참에게 일 가르치는 것에 잠시 우쭐해하고, 친한 동네 형인 추기자(김상호)와 대포한잔 기울이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박봉에 찌그러져 가는 집에 살면서도 청각장애인 아내가 봉투를 붙이는 모습이 안쓰러워 성질을 부리고, 다리가 불편한 아들이 급우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속상하다. 파월용사라는 자부심이 있고, 형사로서 적당히 유능한 편이지만, 한국전쟁 통에 입산한 아버지를 둔 것을 약점으로 여긴다.



<보통사람>은 성진을 묘사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당시 시대상에 대한 디테일한 재현과 손현주의 연기로 성진의 캐릭터가 오롯하게 살아난다. 그가 안기부 간부를 만나는 자리에서 고약한 자기 발 냄새를 의식하는 모습이나 최헌의 ‘오동닢’을 부르며 올드한 춤사위를 보이는 장면은 당시를 기억하는 관객의 무의식을 두드린다. 하지만 손현주의 명연기가 진짜로 빛을 발하는 지점은 성진이 권력의 떡고물을 얻어먹고 득의양양 변해가는 모습이다. 요정에서 안기부 신차장(장광)은 성진의 월남전 참전 이력을 추어준다. 성진이 까마득히 어려워하는 최규남(장혁)의 법무관 복무 경력을 은근히 무시해가며, 둘은 참전용사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가 안기부의 지시에 충성을 다한 것은 아들을 수술시켜 주겠다는 말이 결정적이었지만, 성진의 남성적 자부심을 자극했던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성진을 전쟁영웅으로 추어주고, 낯선 여자와 성적 친밀감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지프차를 끌고 아들 학교에 나타나 아들을 괴롭히는 녀석에게 으름장을 놓게 해준다. 이때를 기점으로 성진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쥐꼬리만 한 권력이다. 하지만 달콤하다. 흔히 당시 평범한 아버지의 대표단수 격인 그가 권력에 부역했던 이유를 단지 가장으로서 가족을 잘 돌보기 위함이었다고 회고하기 쉽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남성적 자부심을 추켜세우며 권력의 거들먹거림을 누리게 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난 전혀 관심 없다”고 말한다. 아들의 다리를 수술하여 장애를 없애주고, 아내에게 2층 양옥집을 사주어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 싶다. 또한 여기에는 남성적 ‘가오’를 누리고 싶다는 욕망도 결부되어 있다. 권력은 두 가지를 동시에 속삭인다. 요정에서 아들의 수술 이야기를 꺼내면서, 여자의 접대를 받게 하는 식이다.

가족은 그에게 일종의 채무이다. 아들과 아내에게 모두 장애가 있고, 아버지가 입산자라는 것은 가족이 족쇄임을 암시하는 꽉 찬 설정이다. 권력은 그 점을 파고든다. 아들을 수술시켜야지...아버지와 무관함을 보이기 위해 더 충성해야지...그들은 실제로 가족을 인질로 삼고, 가족이 잘못된 후에도 “네 마지막 선택으로 인한 것”임을 강조하며 죄의식을 부추긴다. 권력은 이 땅의 남성들에게 가족에 대한 채무와 남성적 가오를 확인시키는 방식으로 개처럼 길들였다.



◆ “제가 공범입니다.”

성진은 우연히 잡은 김태성(조달환)을 취조하다가 놀라운 자백을 듣는다. 잡범처럼 보였던 그가 살인을 털어놓은 것이다. 사실 그는 경찰에 의해 전문 절도범(발바리)으로 조작될 뻔 한 인물이다. 성진이 눈앞에서 발바리를 놓치고, 당장 발바리를 잡아오라는 윗선의 독촉이 심해지자 반장은 호구처럼 보이는 김태성을 발바리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이것은 이후에 벌어진 일들의 복선이자 당시 이러한 사건조작이 흔했음을 말해준다. 하기야 <살인의 추억>등을 통해 익히 보던 바이다.

<보통사람>은 상당한 디테일을 자랑하는데, 영화의 초반에 비추는 경찰서 실내에는 “천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는 문구가 액자로 걸려있다. 성진은 신참에게 지나가는 말로 “왜 잘못되었다고 항의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는 성진의 양심이 흔적처럼 남아있음을 말해준다. 누군가 말려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다행히 추기자의 감시와 항의로 조작은 미수에 그치고, 성진은 진짜 발바리를 잡아 양심의 짐을 던다.

그런데 불쌍하게만 보였던 김태성이 살인범이라니! 이후 성진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안기부의 부름을 받고 황송한 마음으로 넘겨받은 사건 파일에 따라, 김태성을 연쇄살인범으로 만드는데 거부감이 없다. 때려서 자백을 받고, 증거를 꿰어 맞춘다. 이것은 업무일 뿐이고, 열심히 할수록 능력을 인정받는다. 상부의 특별한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엄청나게 많은 일을 짧은 시간에 소화해낸다.



물론 찜찜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기자의 말처럼 “신장이랑 체중미달로 군대도 면제받았고,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김태성”이, 운전면허도 없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며 17명이나 죽였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추기자는 “정국을 덮기 위해 있지도 않은 연쇄살인범을 만들고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안기부에서 내려온 결정이고, 최규남 같은 엘리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자 경찰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라 하였고, 무엇보다...지금 발을 뺄 수 없다. 바로 “내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균적인 욕망을 지닌 아버지이자 남성으로 ‘보통사람’이다. 대단한 권력을 탐했거나 누린 것도 아니지만, 어느새 공작정치의 수족이 되어 있다. 그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추기자의 죽음을 통해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영화는 추기자의 죽음과 경찰서 백구의 죽음을 나란히 놓는다.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사람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의 차이. 성진이 개의 죽음에 화를 내는 것을 기점으로 다른 윤리적 감각으로 건너간다. 성진은 민주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제가 공범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영화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대사이다. 영화는 민주화를 위해 양심을 지켰던 추기자의 관점에서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단물에 취해 독재 정권에 부역했던 성진의 공범의식을 고백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 ‘보통사람’의 역설

영화에서 ‘보통사람’은 중의적으로 쓰인 단어이다. 추기자에게 성진이 “형이 대체 뭔데?”라고 묻자 추기자는 “보통사람,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이라 말한다. 하지만 성진이 이해하는 ‘보통사람’은 적당히 썩은 시류에 영합하면서 가족이나 잘 보살피는 사람이다. 사실 당시의 평균적인 의식도 그러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목숨을 걸며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은 소수였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가족의 안위와 개인적 성공을 꿈꾸었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죄의식과 부채감을 나누어 가졌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소수의 사람들 덕분에 민주화가 진전된 지금,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세대로서의 자부심을 이야기하고, ‘보통사람’에 대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꾸는 시민’으로 정의한다.

흔히 87년 민주항쟁은 절반의 성공이라 말한다. 수백만이 거리에 나와 군부독재를 굴복시켰지만, 직선제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당시 노태우 후보의 캐치프레이즈가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였다. 그가 호명한 ‘보통사람’은 주기자가 말한 ‘보통사람’과 다른 뜻을 지닌다. 목소리 큰 소수의 운동권이 아니라,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소시민을 뜻한다. 바로 그 지점에 386세대의 패착이 존재한다.



90년대 삼당합당과 문민정부의 위선을 거치면서,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냉소가 쌓여갔다. 외환위기 속에서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지만 이후 빠르게 진행된 신자유주의 화는 87항쟁으로 얻은 민주화의 성과를 껍데기처럼 만들었다. 변절한 운동권과 제도권으로 흡수되어 신자유주의 통치성 속으로 빠르게 분화된 민주인사에 대한 환멸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제대로 돌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가령 주기자 역을 맡았던 김상호가 늙은 투사의 모습으로 짧게 등장했던 <오래된 정원>은 굴절된 시대정신에 대한 회한과 냉소를 담지 않았던가. 그러한 자조를 바탕으로 정권을 넘겨주었고, 민주주의의 퇴행이 시작되었다.

<보통사람>은 변절과 굴절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 성진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가 어떻게 포획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공범임을 자백하게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80년대를 말하면서 단지 ‘순수한 아버지의 가족애’를 말하거나 ‘올곧은 투사의 무용담’을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경제적인 안정과 인정에 대한 욕망은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든 안했든 그 세대를 집어삼켰다. 그러기 때문에 소시민의 공범으로서의 부채의식을 명확히 바라보며 80년대의 시대정신을 짚어내는 것이 영화가 취해야 할 윤리적 태도이다.



◆ 최규남의 얼굴

영화 속 최규남(장혁)은 누군가를 몹시 연상시킨다. 영화는 3년 전 <공작>이란 이름의 시나리오로 캐스팅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시나리오는 1975년 김대두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그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김대두 사건의 흔적은 <보통사람>에도 남아 있다. 세탁소에 맡긴 피 묻은 청바지가 단서가 되었다는 점이나 김대두이라는 이름의 한자와 같은 뜻인 김태성이라는 피의자이름이 그것이다. 그런데 김대두 사건이 있었던 1975년 당시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이 김기춘이다. 유신시대 김기춘이 한참 활약하고 있을 때이니, 대한민국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김대두 사건도 조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어볼만하다. 용산참사 당시에도 강호순 사건을 키우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러고도 남지 않았을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영화는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기춘이 청와대비서실장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주무르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을까. 이후 시대적 배경이 1975년에서 1987년으로 바뀌어 제작이 이루어졌다. 박정희 시대를 그리는 것보다 전두환 시대를 그리는 것이 덜 금기시되었던 모양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영화에는 김기춘의 존재가 음으로 양으로 들어가 있는데, 최규남의 얼굴과 목소리는 정확하게 그 도상을 재현한다.



추기자의 죽음이 87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그린 영화를 보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모티브 삼아 허구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당시 고문치사를 당한 사람이 박종철 한 사람이었을까. 박종철 이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박종철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에 대한 민주진영의 분노와 저항이 쌓여가다가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한 첫 사례였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김태성에 대한 두 번의 사건조작과 추기자와 성진에 대한 간첩조작을 보여준다. 최규남은 추기자를 고문하기 전에 “지금부터 법집행을 실시한다”고 말한다. 즉 사건조작에 대해서도 ‘법집행’이라는 말을 쓴다. 그들이 법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사고하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성진은 자신이 김태성을 연쇄살인범으로 만들던 것과 익숙한 방법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된다.



영화는 마지막을 통해 성진이 30년이 지나 재심법정에 서는 장면을 담는다. 영화 <자백>의 엔딩 크레딧에서 보았듯이, 그동안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조작사건이 있었다. 그중 일부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30년의 간극을 넘어 현재의 우리가 87항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현재화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때 우리는 열심히 싸웠노라 무용담에 젖어서는 안 된다. 내 안의 부채감을 딛고,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독재세력들과 싸워 미완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혁명의 열기를 대선 국면으로 사그라뜨리면서, 피로 얻은 민주화의 성과를 ‘보통사람’이라는 자족적 욕망을 파고드는 후보에게 빼앗겼던 역사를 반복해선 안 된다. 다시 촛불혁명의 열기가 대선 정국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국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경고를 던지기 위해 이 영화가 당도한 것은 아닐까. 87항쟁의 30주년을 맞는 해이자, 30년 만에 도래한 혁명의 시기에 반드시 숙고할만한 영화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보통사람>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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