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의 질문, 나라의 주인은, 종은 누구인가

[엔터미디어=정덕현] “양반 사대부 사내들이 툭하면 삼강오상 따위를 들먹이면서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천인과 양인이 다르다 핏대를 세우지만 사실 그건 다 지들 편하자고 하는 개소리다. 남자나 여자나 노비나 주인이나 적자나 서자나 기실 다 같은 게지. 다를 것이 없어. 그들을 다 하나로 묶을 수 있거든. 그들은 오직 나의 종일뿐이다. 천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자는 오직 한울님의 아들 나뿐이다. 헌데 그 종들이 내게 수박을 먹어라 말아라 그리 할 수 있는 것이냐?”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연산(김지석)은 녹수(이희늬)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에게 백성들은 평등하다. 오직 한울님의 아들인 자신의 종으로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 이런 인식은 홍길동이 가진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길동은 양반이고 천인이고 남자고 여자고 왕이고 신하고 상관없이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먹고 싸고 자고 말하는 것이 다 똑같은데 임금이나 신하나 주인이나 종이나 남자 여자 장자 서자 아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백성 모두를 종으로 여기는 연산은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연일 연회를 열고 변방에 오랑캐가 출몰하거나 심지어 도적이 관아를 털고 다녀도 별 관심이 없다. 오랑캐들이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아도 말을 공물로 빼앗아가 텅 빈 역관 때문에 그 사실을 알릴 수조차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왕은 직무유기를 당연시 하고 있고, 그 사이 사실상 백성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건 홍길동이라는 도적이다.



홍길동과 그 일당들은 관아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억울한 일들을 해결해주며 심지어 오랑캐들을 일망타진하기도 한다. 그들을 잡기 위해 관군들이 나서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이들을 숨겨준다. ‘백성의 마음을 훔친 도적’으로서의 홍길동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 이런 사실을 간파한 송도환(안내상)은 연산에게 이렇게 간한다. “전하 가짜 첨지 홍가가 재물을 훔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자는 전하의 백성,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나이다.”

우리에게 있어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힘을 더하는 실질적인 존재들은 어쩌다 보니 국민이 되었다. 정치의 문제이든, 경제적 문제이든 권력자들이 해결해 나가야 마땅한 일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만드는 일이 더 많았다. 선거 때 반짝 국민이 주인이며 자신들은 종이라고 하고는 시간이 지나면 심지어 ‘개, 돼지’ 발언이 나올 정도로 국민을 종으로 보는 행태들이 계속 이어졌다. <역적>이 그려내고 있는 홍길동의 이야기는 그래서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또 그저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도 아닌 현실적 질감들을 만들어낸다.



<역적>은 억울한 민초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홍길동 일당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춘향전’, ‘심청전’ 그리고 ‘장화홍련전’ 같은 고전을 끌어왔다. 물론 이건 <역적>의 이야기를 더 발랄하고 유쾌하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지만, 그 안에도 숨겨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많은 고전들을 들여다보라. 거기에는 늘 억울한 민초들의 자화상이 드리워져 있다.

<역적>의 이 이야기를 어찌 옛 이야기의 재해석 정도로만 여길 수 있을까. 특히 탄핵 시국을 겪으면서 민감해진 민초 의식은 <역적>이 담고 있는 민심 도적 홍길동의 이야기를 남다르게 느껴지게 한다. 홍길동과 연산의 상반된 입장을 통해 드러내는 누가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고 종인가 하는 질문 역시.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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