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발광’,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엔터미디어=정덕현] 결국 흙수저는 흙수저일뿐이고, 금수저가 모든 걸 가져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MBC 수목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가 갖고 있는 현실 인식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은호원(고아성)이 사주 아들인 서현(김동욱)이 자신들을 인턴으로 합격시킨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이미지메이킹에 이용했다는 이유로 “고소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무언가 갑질에 대항하는 흙수저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협박은 그저 서현에게는 귀여운 짓 정도로 치부되었고, 은호원 역시 진짜 고소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거래를 하기 위함이었다. 인턴 심사를 하지 않겠다는 박상만 부장(권해효)이 내린 결정을 서현을 통해 뒤집으려 한 것.

과연 은호원의 이런 선택은 시청자들에게 사이다가 될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 전개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일까. 애초에 인턴이지만 똑부러지게 할 이야기는 하는 은호원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한 마디 쏘아붙이는 것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의식 같은 것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호원이 서우진(하석진) 부장과 알콩달콩한 멜로 관계를 만들어가고, 한 때는 키다리아저씨로 여겨졌던 서현이 사실 이들 인턴들을 자신의 이미지메이킹에 활용하며 하우라인의 경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드라마의 날카로움은 무뎌지기 시작했다. 대신 “현실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패배주의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정태(이윤상) 본부장의 비리를 서우진이 조사하게 만들어서 결국 그를 대기발령으로 내모는 박상만의 이야기나, 사실은 같이 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박상만이 서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자신은 모면하는 이야기, 그리고 결국은 새로운 본부장으로 서현이 입성하게 되는 이야기는 직장생활의 적나라한 권력 시스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대기발령을 명받고 사무실을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한정태의 모습은 결국 오랜 직장생활의 말로를 보는 듯했고, 그것이 서현이라는 금수저 권력에 의해 간단히 이뤄진 것이란 사실에 허탈감마저 느끼게 했다.

결국 이 모습은 모든 직장인들의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죽어라 열정을 다해 겨우겨우 정사원이 되고 라인에 들어 충성을 다해 조금씩 진급해 어느 정도 권력을 쥐게 되면 다른 경쟁자에 의해 하루아침에 밀려나는 삶. 그것이 직장생활의 끝이라는 것. 그런 상황에 은호원과 인턴들이 그나마 정규직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 와중에 인턴 은호원과 부장 서우진이 사적인 멜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마치 드라마가 현실은 바뀌지 않고 그러니 사적인 삶에서나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자체발광 오피스>는 좀체 바뀌지 않는 공고한 회사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한 점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현실과 싸워나가기보다는 그런 현실에 적당히 적응해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씁쓸하게 다가온다. 드라마의 현실 인식과 전망, 그리고 주제의식이 어째서 이리도 흔들리는가.

드라마가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작품으로서 그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어떤 메시지나 주제의식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현실에 대한 적응이 그 해답이라면 그건 자칫 진짜 문제의 근원에 대한 회피가 되지 않을까. <자체발광 오피스>의 패배주의적 관점이 아쉬운 이유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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