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작이 된 ‘역적’, 돌아보면 철저한 준비가 보인다

[엔터미디어=정덕현] 이 드라마는 사전에 얼마나 철저한 준비를 했던 것일까. MBC 월화드라마 <역적>을 보면 이 사극이 처음부터 30부작에 이르는 대장정을 꼼꼼하게 준비한 정황이 엿보인다. 첫 회의 첫 시퀀스에서 우리는 정체를 묻는 연산(김지석)의 질문에 길동(윤균상)이 “나는 그저 내 아버지 아들이오. 씨종 아모개(김상중). 조선에서 가장 낮은 자.”라고 말했던 그 장면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장면은 무려 25회를 지나 다시 등장한다. 즉 25회의 그 장면에 이르는 과정을 드라마가 미리 어느 정도는 상정해놨다는 뜻이다.

<역적>의 구성을 보면 초반 아모개를 중심으로 한 어린 길동의 삶이 보여지고, 성장한 길동이 익화리에서 패거리를 모아 건달이지만 큰 어르신으로 살아가다가, 연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차츰 소명의식을 갖게 되고 홍첨지라는 공적인 존재로 서게 되며 연산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살아나면서 그와 공적으로 대결하는 그 과정들이 유려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과정은 길동이 사적인 복수심에 불타던 모습에서 공적인 소명의식을 갖는 그 흐름이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 “도적이 왕이 되고, 왕이 도적이 된” 세상에 구원자로 나서게 되는 흐름이다. 또한 뿔뿔이 흩어졌던 길동과 형 길현(심희섭) 그리고 어리니(이수민)가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과정이며, 각각 살아오며 겪었던 그 세월의 공력들이 모여져 연산이라는 공공의 적과 대적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 30부작이라고 하면 결코 짧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런 대작 사극의 경우 어떤 흐름에 빈틈이 생길 가능성이 높지만, <역적>은 그 점층적인 이야기 구조가 첫 회부터 지금까지 촘촘히 쌓여 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길동이 큰 어르신에서 홍첨지가 되어가고, 길현이 타인의 이름을 훔쳐 왕의 신임을 얻지만 결국 뒷통수를 치고 길동과 합류하며, 나아가 어리니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 송도환(안내상) 밑에서 거인이 되는 혹독한 삶을 살아오다 다시 길동과 길현의 품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연산이 차츰 폭력을 통해 권력 시스템을 장악해가며 광기를 드러내는 모습 역시 점층적으로 보여진다. 연산이 하려는 일과 길동이 하려는 일이 부딪치며 백성을 두고 벌어지는 왕과 도적의 대결구도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너희가 매질을 당해 죽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공포 정치를 내세우는 연산이 향주목을 본보기 삼아 민초들을 도륙하라고 명령하자, 길동은 관군들과 싸워 향주목을 구하고는 그곳을 “해방구로 만들 것”이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이 두 인물의 첨예한 대결구도가 다른 정치, 다른 인식의 차원에서 비롯된다는 걸 말해준다.

태생적으로 결정된 수직적 체계 속에서 폭력을 앞세워 그 공포를 에너지 삼아 백성들을 다스리려는 왕. 그 수직적 체계를 깨고 수평적 사회를 꿈꾸며 백성들을 해방시킴으로써 그들 스스로 존경하게 되는 도적. 드라마는 이 대비를 통해 질문한다. 누가 왕이고 누가 도적인가를.



실로 평이할 수 있는 ‘홍길동’이라는 소재를 갖고 <역적>이라는 역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30부작이라는 큰 그림 속에 캐릭터와 이야기 흐름 전체를 관망하는 구성과, 그 구성 속에 이 대결구도가 의미하는 시대정신을 녹여낸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갈수록 힘이 약해지다가 결국 ‘용두사미’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사뭇 다른 <역적>의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역적>이 보여주듯 역작은 우연히 탄생하는 게 아니다. 철저한 준비 속에 만들어지는 것일 뿐.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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