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홍길동 이야기에서 광주항쟁이 떠오르는 까닭

[엔터미디어=정덕현의 이슈공감] 백성들을 지켜야할 관군들이 백성들을 향해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른다. 연산(김지석)은 향주목을 본보기 삼으려 한다. 이 폭군은 정치란 폭력이라 생각하는 위인이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의 사지를 잘라 공포를 심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향주목의 무고한 백성들을 폭도로 몰아 모조리 몰살하라 명령한다.

향주목 사람들이 모여 연산의 폭정을 규탄하고 있을 때, 관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발사명령에 따라 날아간 관군의 화살이 백성의 가슴을 꿰뚫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진압. 학살.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이 아닌가. 1980년 5월18일 광주. 전두환이 이끈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시민들 앞에서 울려 퍼진 총성. 그리고 이어진 무자비한 군홧발들. 광주 민주화 운동의 그 장면들이 떠오른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MBC 월화드라마 <역적>의 향주목은 광주를 모델로 했던 걸까.

젊은 유생들은 연산의 폭정을 대자보를 붙여 항거하고, 그러다 관군에게 잡혀 끌려가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피눈물을 흘린다. 향주목 사람들이 무참히 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길동(윤균상)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의 항거에 합류하고, 폭력 앞에 생존하기 위해 칼을 든다. 그들의 저항은 그래서 폭력이 아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연산은 그것이 반란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1980년 광주를 호도했던 전두환 신군부의 논리가 아니었던가.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되어버린 향주목이지만 그 곳에 남은 이들은 쌀 한 톨 훔치는 이 없이 질서정연하다. 또한 거기에는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혹은 양반이나 노비나 어떤 위계도 없이 함께 모여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눈다. 자식을 잃은 어미와 남편을 잃은 아내 그리고 아내를 잃은 남편과 부모를 잃은 자식들이기에 다가오는 칼과 활의 위협 앞에 똑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것. 그 곳은 곧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의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평해지는 이상향의 모습을 그려낸다. 1980년 광주의 모습 그대로다.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군인인지라 억지로 백성들을 향해 칼을 들이대고 있지만 관군들 역시 마음이 흔들린다. 향주목의 성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에 관군들 또한 잠시 본분을 잊고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한때 연산을 지키던 호위병들조차 무고한 사람들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것을 못내 견디지 못해 길동에 합류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었을 것이다. 광주에 투입된 군인들 중에도 그 때의 그 충격을 오래도록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듯이.



물론 <역적>의 그 어디에도 광주항쟁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권력자의 폭력을 앞세운 정권 장악과 이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는 어느 곳이든 어느 시대든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역적>의 향주목이라는 가상공간의 장면들 속에서 광주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것이 왜 지금 <역적>이라는 사극을 통해, 그것도 홍길동 이야기의 재해석을 통해 그려지고 있는가하는 점이 중요하다.

촛불 민심이 잘못된 권력자의 전횡을 막고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그래서 이제 조기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군부의 힘을 동원해 폭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이들이 농단해온 암울한 시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민심이 진정한 권력으로 등장해 잘못된 권력을 바로잡는다. <역적>은 아마도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러한 민초들의 깨어난 의식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일찍이 깨어난 민심을 보여줬던 광주 민주화 운동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 때가 새삼스러운 5월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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