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식당’, 윤여정의 노년 풍경이 아름다운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tvN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의 성공에는 물론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 발리의 아름다운 해변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삶의 피로에 뭉친 마음은 몽글몽글해진다. 그 안락한 풍경에서 소소한 극적 요소를 발견해내는 나영석 PD 팀 특유의 힘 역시 이미 경지에 올랐다. 윤여정과 그 주변의 이서진, 정유미, 신구 등이 보여주는 다정다감한 팀워크 또한 이 예능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큰 힘이다.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식 퓨전메뉴를 먹으며 속닥거리는 대화를 엿듣는 맛도 있다. 거기에 손님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늘 초조하고 종종거리는 주방풍경에 오소소한 스릴감까지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정작 윤식당의 사장이자 요리사, 배우 윤여정이 없다면 <윤식당>은 존재할 수 없는 그림이다. 다른 어떤 여배우가 그 자리에 서 있어도 지금 같은 <윤식당>의 그림이 나올 수 없다. 여배우는 아니지만 맛깔스런 말솜씨와 더불어 모든 요리를 뚝딱 끝내는 빅마마 요리연구가 이혜정 선생이 서 있은들 마찬가지다.

<윤식당>의 진정한 맛은 낯선 발리의 풍경에서도 여전히 묻어나오는 윤여정의 색깔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녀의 솔직함, 그녀의 위트, 그녀의 영어, 그녀의 까칠함이 감도는 친절함, 한탄조는 아니지만 그녀 특유의 푸석푸석한 푸념이 있어야만 <윤식당>은 완성된다는 의미다. 인터뷰에서 종종 느껴지던 윤여정 특유의 매력은 <윤식당>을 통해 고스란히 예능의 재미로 살아난다.



<윤식당>의 첫 장면은 새 예능 프로젝트를 위한 나영석 PD와 윤여정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여기서도 윤여정은 자신의 솔직함을 카메라 앞에 고스란히 드러낸다. 지금 막 피부과에서 다녀와서 피부가 다 뒤집어졌으니 너무 가까이 찍지 말라는 고백이다. 여기에 나영석 PD가 모자이크 처리를 해주겠다고 하자 윤여정은 모자이크 아닌 ‘뽀샵’을 부탁한다.

이어 장면은 나영석 PD가 촬영한 윤여정의 데뷔50주년 행사장면으로 이어진다. 배우 이서진이 윤여정에게 축사를 하는 장면에서 윤여정은 툭 끼어든다.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 해 봐.”

“진심으로 말씀드리자면 술, 담배를 좀 줄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윤여정은 담담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건 진심이야. 진심을 말하랬더니 진심을 말하네.”

이 짧은 초반에도 우리는 노배우 윤여정이 지니고 있는 매력을 간파하게 된다.

솔직함, 담담함, 쿨함.



더구나 이런 윤여정의 태도는 포장이나 연기가 아닌 그녀의 삶에서 배어나온 것들이다. 대중들은 얼추 그녀의 지나온 삶을 짐작할 수는 있다. 유명스타와의 결혼과 이혼, 그 후 생활비에 쪼들려 조연배우로 1980년대에 다시 드라마에 복귀한 후의 모습들을. 그 시절 윤여정은 대중들에게 그리 호감 가는 배우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유니크한 미소와 매력으로 드라마 <장희빈>, 영화 <화녀>, <충녀>로 독특한 자리를 만들어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혼 후 드라마에 복귀했을 때는 앙상한 외형에 거친 목소리를 지닌 중년여배우였다. 드라마가 사랑하는 좋은 아내, 착한 엄마, 맏며느리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윤여정은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재발견된다. 그녀의 동년배나 윗세대보다 오히려 젊은 드라마 팬들이 호감을 보이는 중년배우가 된 것이다. MBC <내가 사는 이유>의 시니컬하지만 인간적인 마담언니를 시작으로 KBS <거짓말>에서 여주인공의 어머니로 등장해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라는 명대사를 남기면서 윤여정은 새로운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무조건 희생하고, 착한 엄마가 아닌 자식과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인간적인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엄마의 모습 말이다.



2천 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영화에도 얼굴을 드러낸 윤여정은 드라마에 등장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배우로서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특히 작년 가을 윤여정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통해 소위 박카스 아줌마로 통하는 성매매 노인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그녀 특유의 드라이한 연기로 퀴어코드와 신파 감성이 결합된 영화에 독특한 색을 입혀냈다. 자칫 감상적으로 흐를 법한 <죽여주는 여자>의 톤을 담담하게 잡아준 것은 오롯이 그녀의 연기다. 그리고 <죽여주는 여자>를 통해 윤여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녀가 여전히 젊은 감각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삶의 허망함을 보여줬던 영화와 달리 그녀의 예능은 풍요롭고 아름답다. <윤식당>에서 윤여정은 웨이터로 등장하는 배우 신구와 함께 노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신구가 정적인 미소 하나에 노년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모두 담는 것과 달리 윤여정의 아름다운 노년은 산문이다. 그녀 자신이 만들어온 지금까지의 인생이 <윤식당>을 통해 쿨하고 담담하고, 때론 귀엽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을 돕는 정유미와 이서진에게 항상 “고맙다”고 솔직하고 다감하게 말할 줄 아는 노년이다. 부끄러움 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그게 당연한 삶의 매너라는 듯. 그리고 그런 센스 있음이 여전히 그녀를 노년의 멋진 스타로 만드는 에센스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tvN, 영화 <죽여주는 여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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