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의 끝은 망청, ‘역적’이 꺼내놓은 이야기사극의 울림

[엔터미디어=정덕현] “듣고 보니 백성들 말이 틀리지 않더군. 생각해보면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이 오직 임금이 폭군인 탓이오? 허면 그 폭군과 놀아난 자들은 어떻소. 그간 임금과 함께 사냥하고 시를 짓고 아첨하고 동지들을 고발하여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면 그 자들이 무사하겠습니까?”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길동(윤균상)의 형 길현(심희섭)은 그들을 설득하러 온 박원종(최대철)에게 도리어 그렇게 말한다. 중종반정의 시작이다. 결국 점점 피폐되어 흥청에서 연희에만 몰두하는 연산(김지석)으로는 더 이상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송도환(안내상)은 반정을 결심한다. 하지만 결국 정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박원종에게 길동을 만나 자신들의 편에 서 달라고 부탁하게 한다. 길동은 이를 허락하지만 동시에 한 마디를 남긴다. “허나 잊지 마시오. 우리가 지켜볼 테니.”

<역적>의 이야기는 이제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다. 왕을 갈아치우기 위해 궁 앞에 모인 백성들은 저마다 횃불을 들고 “임금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를 외친다. 이 정도의 이야기에서 최근 우리가 겪었던 탄핵 시국을 떠올리지 않을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 <역적>이 특별한 사극으로 다가왔던 건 시의성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결국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려던 이야기는 왕과 백성의 대결이고, 백성이 왕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역적>이라는 사극이 남긴 가치는 이러한 시의성에 맞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 사극은 지금껏 여러 종류의 사극들이 갖고 있던 여러 결들 중에서 ‘이야기’라는 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극으로 남았다. 애기장수 설화에서부터 마블사에서 나올 법한 슈퍼히어로물의 이야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 물 한 사발을 떠주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왕궁에서 벌이는 ‘스파르타쿠스’의 격투 이야기, 그리고 왕에게 이야기로 접근하는 가령(채수빈)의 모티브로 떠오르는 ‘아라비안나이트’에 중간에 살짝 들어갔던 가면 콘셉트의 이야기까지 <역적>이 차용한 이야기틀들은 다양했다.

이런 점들은 그간 사극들이 역사에 초점을 맞추거나, 역사에 기반해 그 위에 그럴듯한 허구를 덧붙이는 접근을 하거나 혹은 아예 역사를 벗어나 판타지까지 뻗어나가는 선택을 하는 방식들과 사뭇 달랐다. 일종의 국적을 뛰어넘는 다양한 ‘이야기 자산’들을 <역적>이라는 사극 속에 묶어 보여준 느낌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홍길동이란 역사적 실존인물을 소재를 선택한 건 적절했다고 보인다.

결국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건 누군가 겪은 어떤 사건들을 재구성하게 되면서다. 그러니 당대 연산시절 홍길동이라는 도적을 모티브로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면 <역적>은 그 실존인물을 가져와 우리 시국에 맞는 이야기로 다시 쓴 것이라고 보인다. 민심은 천심이고 “흥청의 끝은 망청”이라는 우리가 최근 목도했던 국가적인 사건의 이야기를 통한 재구성.



<역적>이 홍길동이라는 고전을 가져와 이토록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냈다는 건, 향후 다른 고전들도 새롭게 해석되어 재구성될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 사극’의 전조가 아닐까. 이미 시작된 <군주>라는 사극 역시 이 ‘이야기 사극’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가면을 쓴 왕세자라는 콘셉트는 여러모로 동서양의 다양한 가면 이야기들, 왕자와 거지 콘셉트 같은 이야기 자산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극이 과거보다 현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건 이미 오래다. 결국 현재 벌어지는 어떤 일들을 환기시키고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적 사료를 찾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역적> 같은 ‘이야기 사극’은 지나친 판타지를 배제하고 대신 동서양에 회자되던 많은 이야기들의 맛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옛날옛날 어느 산골에....”로 시작되던 할아버지 무르팍에서 듣던 옛이야기의 묘미를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행보. <역적>이 열어젖힌 사극의 또 다른 스타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