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추>가 이전의 <만추>와 같은 점 혹은 다른 점
김태용 연출의 <만추> 리뷰

[오동진의 영화가이드] 김태용 감독이 만든 <만추>의 이미지는 포기(foggy)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건 당초 기획과 달리 뉴욕 센트럴파크가 아니라 미국 시애틀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찍은 탓도 있을 것이다. 공간을 바꾸면서 김태용은 제목 만추의 느낌, 곧 깊은 가을의 맛을 앞을 내다 보기가 어려운 안개 속 방황의 분위기로 바꿔 버렸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 주인공 애나(탕 웨이)가 시애틀 외곽의 감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그런 상황이 펼쳐진다. 그녀가 탄 버스는 한치 앞을 내다 보기 어려운 안개를 이유로 비교적 긴 시간 운행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애나와 훈(현빈)의 운명은 그 지점에서 엇갈리게 된다.

안개 속에서 잃게 되는 건 꼭 물리적 길만이 아니다. 인생의 길도 안개 속에서 갇히면 늘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게 되기 마련이다. 부유하는 삶. 안개가 걷히고 다시 버스가 떠나려는 순간, 남자와 함께 마시려고 커피 두잔을 사오던 애나가 그의 부재를 깨닫고 여기저기를 헤매는 모습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가슴 한구석을 먹먹하게 적신다. 김태용의 <만추>는 잔인하게도, 사람들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희망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헛됨과 희망, 두 가지 모두에서 쉽게 놓여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나는 7년전 남편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왔다. 자세한 사정은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보게 되면 짐작할 수 있거니와, 애나가 사랑했던 남자는 따로 있었던 듯 하고 그 이름은 왕징(김준성)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둘의 불륜을 알아 챈 남편과 큰 다툼이 있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죽게 한 듯 싶다. 이른바 과실치사일 것이다. 애나의 집안은 아마도 오래 전 시애틀에서 정착을 하고 비교적 번듯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중산층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감옥에 있는 애나가 사흘간 감옥밖으로 외박을 나오게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녀가 모범수로 살아가서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보증금’을 낼 수 있는 집안의 경제적 여건때문이기도 하다.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72시간 외박 허가를 받는다.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 마치 누군 가에게 좇기듯 버스에 탑승한 한국인 청년 훈이 심란한 그녀의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훈은 미국 땅에서 이런저런 ‘누님들’에게 에스코트 일을 해주며 살아가는 지골로, 곧 남창이다. 그를 좇는 무리는 어떤 여성의 남편과 그 일당이며 훈은 처음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만약 다시 사랑을 한다 해도 시한부의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여자와, 애초부터 사랑은 시한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이미 사랑에 대해서는 굳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여자를 향해 남자는 계속해서 노크를 해댄다. 만약 당신이, 하루가 지나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게 될 여자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고, 호감을 갖게 되며, 심지어 마음이 끌리게 된다면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이며 또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여자에게 희망과 기대를 불어 넣어 주는 것은 섣부른 짓에 불과한 것일까. 영화는 짧은 하루의 불나비같은 사랑의 행각을 통해 역설적으로 사랑의 영속성, 그럼으로써 더욱더 불가해지는 사랑의 의미를 되찾게 만든다. 지나치게 고단한 삶은 사랑을 무의미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지만 그럴 때일 수록 다가오는 사랑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인생의 좋은 시기는 한순간에 휙 지나가 버리는 것이어서 지금 이 순간, 불꽃처럼 사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1966년 이만희 감독이 만든 원작 <만추>와 1975년 김기영 감독이 같은 내용으로 만든 <육체의 약속>, 그리고 1981년 김수용 감독이 다시 같은 제목으로 한번 더 리메이크한 <만추>를 생각하면, 이번 김태용의 작품은 사뭇 다른 지점에 서있음이 감지된다. 일단 주인공 남녀가 처한 개인적 상황의 설정에 이렇게저렇게 손을 댔는데, 그건 현재적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방향이었다고 보여진다.



원작 <만추>에서의 남자는 이번 리메이크 작과는 달리 남창이 아니라 위조지폐범으로 경찰에 쫓긴다. 원작 <만추>의 여자는 이번과 달리 영화 마지막에 9년의 생활을 끝으로 가석방되는 것이 아니라 무기수로 계속해서 감옥에 남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남녀, 곧 애나와 훈은 다시 한번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치를 남긴다. 그래서 영화는 사실, 잔인한 척, 조금은 보다 희망적인 끝을 향해 달린다. 사랑은 희망을 먹고 살며, 희망의 삶에 있어 필요조건이란 끝까지 상대를 기다리겠다는 사랑의 마음이다.

훈이 애나를 데려간 놀이동산에서 둘은 한 무용수 커플의 애정행각을 목격한다. 마치 판타지 인형극을 보듯 둘의 눈앞에 펼쳐지는 남녀 무용수의 애정의 몸짓은 이 영화가 고단한 현실의 삶을 상상으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두 주인공의 애처러운 마음을 담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삶은 비루하고 남루하지만 사람이 끝까지 존엄할 수 있을 때는, 자신이 여전히 사랑의 순수함을 믿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지키려 할 때이다. 김태용 연출의 순혈주의, 그 순수함은 이 장면에서 최고조로 빛을 발한다.

영화 후반부 훈과 애나 간에 비교적 롱 테이크로 펼쳐지는 키스 신도 미학적 측면에서 오랜 기억으로 남을 만한 장면이다. 서로는 서로의 입술을 깊고 오래 탐하지만 기이하게도 이 장면은 전혀 섹슈얼하지 않다. 둘의 키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지 않게 오래 응시하게 만든다. 사랑한다면, 저들처럼 키스를 나누고 싶게 만든다. 김태용이 끝내 애나와 훈으로 하여금 섹스를 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는, 아마도 둘 간에 흐르는 감정이 욕망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둘은 욕망 때문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회복하고 싶기 때문에 밀착된다.

<만추>는 이전에 만들어진 세편의 <만추>와 가까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먼 지점으로 달아난 영화다. 새롭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목처럼 늦은 가을, 완숙의 가을이 아니라 깊게 영근 인생의 의미를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올드 팬들에게조차 새영화 <만추>를 권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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