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마저 양극화된 시대에 여행 예능이 나아갈 길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작렬하는 햇볕이 점점 뜨거움을 더해가는 요즘, TV에서는 여행의 바람이 불고 있다. 먹방, 쿡방, 셀프인테리어 등등의 라이프스타일을 끌어들이던 예능이 이번에 여행과 만난 것이다. 시사상식 용어가 된 욜로나 포미족과 같이 현재의 만족과 체험을 중시하는 흐름이 트렌드가 되면서 여행 예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탓이다. 덕분에 올봄 나영석 사단의 <윤식당>을 시작으로 자유여행 콘셉트의 <베틀트립>, 식도락 여행을 다루는 <원나잇 푸드트립>, 패키지여행 포맷인 <뭉쳐야 뜬다>까지 다양한 여행 전문 예능이 대목을 맞이했다.

본격 여행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여행길에 합류한 예능도 많다. <미운우리새끼>는 스페인 이비자섬 투어를, <나 혼자 산다>는 일본과 발리를, <런닝맨>은 일본, 러시아, 몽골을 다녀왔다. 해외여행만큼이나 볼거리가 가득한 국내 여행도 매주 이어진다. 캠핑카를 타고 여행길에 나서는 <집시맨>부터 우이도에서의 섬스테이를 다루는 <섬총사>, 통영, 순천, 강릉 등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는 나영석 사단의 새 프로그램 <알뜰신잡>을 비롯해 제주도에서 제작한 <효리네 민박>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 우리에겐 일상의 공간인 서울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MBC 애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와 같은 색다른 콘셉트의 여행 예능도 탄생했다.

한 여행 예매업체의 통계에 따르면 올해 여행객의 급증세는 사상최대 규모라고 한다. 지금의 트렌드가 단순히 매체에서만 떠드는 호들갑이 아니라 실제로 홀로 여행을 떠나는 20~30대가 대폭 늘어났다고 한다. 분명, 여행 예능도 이런 흐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하고 싶은 것은 욜로에도 깃든 양극화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지 않고 이런저런 사유로 집에서 TV를 통해 여행을 대신 즐기는 시청자들의 존재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여행 예능은 어느 선각자가 ‘떠나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는 류의 설렘을 전파하지 않는다. 마치 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TV를 보는 것만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도록, 다른 누군가가 즐기는 여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서 재미를 만들어낸다.



생각해보자. 욜로의 시작은 끊임없는 경쟁과 오늘을 담보 삼아 내일의 안녕을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는 사회가 예전만큼 기회를 주지 못한다는 경험에서 나온 흐름이기도 하다. 즉 장기침체, 경기불황이 잉태한 문화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 욜로 열풍과 동시에 나타난 것이(그래서 욜로라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 이른바 ‘탕진잼’이다. 탕진잼이란 평소 살까말까 고민하던 자동차를 계약한다거나 세일도 안 하는 백화점에 가서 카드빚으로 고액의 뭔가를 지르는 게 아니다. 수중에 얼마 없는 적은 돈으로 소소하게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즐거움에 관한 것들이다. 편의점 앞에 방치되었던 인형뽑기 기계가 최근 인생역전 스토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다.

욜로가 말하는 현재의 만족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체험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당장 일주일, 한 달을 버텨야 하는 사람들에겐 도전의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은 또 다른 판타지일 수도 있다. 욜로에 경도되어 스테이케이션(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관광명소 둘러보기보다는 현지 문화를 체험하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분명 늘어났겠지만, 그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여행을 가는 대신 늘어난 여행 예능을 즐기면서 느릿한 여행을 대리만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타깃은 이쪽이란 말이다.

로망마저 양극화된 시대에 여행 예능은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실제로 욜로족의 현실을 보여주는 욜로 콘텐츠나, 여행지 소개에 치중하는 여행 예능은 죄다 대리만족의 판타지를 제공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마니아가 생길 정도로 자리를 잡은 <배틀트립>도 마찬가지다. 최근 휴가철을 맞아 본격적으로 ‘휴가 족집게 여행지’편을 편성하고 발리, 푸껫 등 시원한 바다가 있는 대표적인 휴양지를 다뤘지만 반응은 평소보다도 시큰둥하다. 실질적인 정보가 될 수 있도록 우리나라에서 여름휴가를 떠나기에 가장 적당한 대중적인 선택지를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비해 반응이 적었다는 것은 실제로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TV로 여행 예능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뜻이다. TV를 보는 것으로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려는 시청자들에게 여행을 즐기기보다 소개에 급급한 지난 2주간의 방송은 특별한 로망으로 다가오기에 부족했다.



나영석 사단의 <꽃보다 청춘>은 해외여행을 예능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예능에서 처음 뵙는 선생님급 배우들과 이서진의 여정도 흥미롭고 신선했지만, 여행의 설렘을 담아내면서 폭발력은 일파만파가 됐다. 초창기 <정글의 법칙>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행지 소개나 이벤트성 관광 대신 일상을 벗어나 떠나고픈 로망에 집중한 사고의 전환이 만든 결과였다.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이 화두인 오늘날 여행 예능은 여기에 더 어려운 기술이 한 가지 꼭 더 필요해졌다. 실제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이른바 하이퍼리얼리즘을 가능하게 하는 재미 말이다. 욜로의 가치와 즐거움, 여행의 설렘과 행복은 알고 있지만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콘텐츠. 그래서 TV를 보는 동안 만큼은 일상에서 잠시나마 떠날 수 있는, 흥분되고 행복한 감정, 여유로운 분위기와 같은 여행의 즐거움을 집에서도 맛볼 수 있도록 정교한 대리만족이 보다 중요해진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KBS,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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