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 김영하·정재승과 ‘효리네’ 이상순의 공통점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tvN 예능 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은 신기하게도 수다스럽지만 시끄럽지 않다. 이 프로그램을 끌어가는 5명의 남자 유희열,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정재승의 수다는 종종 초여름의 바람처럼 은은하게 시원하다. 여행지를 배경으로 중년 남자들이 나누는 잡학사전 같은 대화의 기류가 시원하고 신선한 공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유치한 게임도 없고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상황극도 없다. 그렇다고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토론 배틀을 벌이는 경쟁구도 예능도 아니다. <알쓸신잡>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들은 술자리에서 나눌 법한 시시콜콜한 잡담들이다. 다만 이 잡담 곳곳에 퍼져 있는 각각의 출연진들이 쌓아온 지식과 살며 느껴온 삶의 인생관이 어우러지며 보는 이들을 은은하게 잡아끈다.

<알쓸신잡>은 익히 알고 있는 떼거지 예능과는 다른 방식의 길을 보여준다. 보통의 남자 다섯 명이 등장하는 예능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끌벅적할지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감을 잡고도 남는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이고, 누군가는 버럭 화를 내고, 또 누군가는 눈치보다 촌철살인의 재담으로 뒤통수를 때린다.



그런 예능은 그런 예능대로의 재미가 있다. 철부지 시절을 잃어버렸거나 혹은 눈치 보느라 철부지 짓을 못하는 다 큰 남자 어른들에게 낄낄거리는 유쾌한 대리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쓸신잡>은 낄낄거리는 대리만족과는 다른 예능의 재미를 준다. 그건 비단 이 프로그램에서 역사와 음악, 음식과 문학, 역사와 상상을 유유자적 넘나드는 출연진들의 잡학적인 지식에 홀려서만은 아니다. 그간 예능프로그램의 남성들에게 느낄 수 없던 어떤 감성의 코드가 곳곳에 배어 있어서다.

사실 예능 속 남성 출연진들에게는 딱히 감성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등락을 반복하는 감정이면 충분했다. 버럭 화를 내거나, 신나서 어린아이처럼 낄낄거리거나, 아니면 팩 토라지거나 하는 것들. 하지만 감성은 그런 눈에 띄는 큰 감정과 달리 섬세하고 아기자기하고 편안하고 개인적인 어떤 것들이다.



현실 속 남자들에게 감성이란 단어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감성적인 남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성적인 남자들을 보여주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쓸신잡>은 이 지식인 남자들이 지닌 특유의 감성을 잡아낸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정말 책을 사랑하고 세상의 지식을 사랑하는 것만 같은 정재승 교수의 캐릭터부터가 그러하다. 그가 조심스레 끼어들며 건네는 말 하나하나에 그의 지식에 대한 감성 어린 애정이 느껴진다. 권력을 위해 지식을 갈구하거나 허세를 위해 지식을 탐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지식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뭉쳐진 과학자 캐릭터는 흔치 않고 보는 이를 흐뭇하게 만든다.

소설가 김영하 역시 본인의 감성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감각 세포가 열려 있는 소설가답게 그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낸다. 이 진중한 목소리의 소설가는 그래서 의외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장면들을 보여준다. 저녁 만찬에 쓰일 ‘문어’를 찾아다니며 “문어, 문어”라고 말할 때, 혹은 경주에서 맛있는 피자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의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이처럼 감성적인 남자들의 매력은 JTBC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 이효리의 남편인 뮤지션 이상순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처음 시작은 톱스타 이효리가 민박집을 한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남편 이상순의 여유롭고 편안한 감성이 이 프로그램만의 매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상순은 유유자적한 제주도와 어울리는 느릿한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여유롭게 다기를 꺼내 차를 우리고, 아내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내와 함께 살림을 하고, 반려견의 식사를 챙겨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듣는다. 아내의 말을 듣고 그 대화를 함께 나누는 순간순간을 즐긴다.

예능 속 감성적인 남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감성의 코드는 대단한 훈련이나 배움의 과정으로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감각에 조금만 민감해진다면, 세상의 지식에 조금만 호기심을 가진다면, 타인의 목소리에 조금만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감성은 싹트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싹튼 감성을 통해 인간은 아주 작은 것에 잠시나마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작은 힘이지만 동시에 한 개인의 어마어마하게 피곤한 삶을 지탱시켜 주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tvN,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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