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작업 신라 이후 1000년 넘게 이어져···또 다른 ‘허왕후 허구’는 무엇인가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카(1892~1982)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이지 않는 대화”라고 말했다. 우리가 과거와 대화해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기에 앞서 거쳐야 하는 기본 작업이 있다. 그 과거, 즉 과거를 기록하거나 다룬 사료가 완전한 창작에 가까운 것인지, 날조된 것인지, 사실을 뼈대로 허구를 부풀린 것인지, 왜곡된 것인지, 편향된 것인지, 과장된 것인지, 축소된 것인지, 아니면 적어도 편집된 것인지 검증해야 한다. 이어 개별 검증을 바탕으로 사료를 취사선택하고 과감하게 교정하며 재편집해야 한다. 과거와의 대화는 그런 연후에나 가능하다.

저자인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거짓 과거와 대화를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를 만들어나갈 뻔했다. 이 교수는 이 책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에서 가락국의 초대 왕인 수로왕의 부인이 인도에서 온 공주였다는 기록이 허구임을 논증하고,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이해관계와 관심에 따라 어떻게 더해지고 윤색됐는지 규명했다. 아울러 현대에 이르러 다시 조명되고 허구가 보태지고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저자가 현재로 전해진 기록에서 한 겹씩 거짓과 윤색을 벗겨내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는 인도의 역사, 사실 여부에 구애받지 않는 불교적인 서술 방식, 이에 따른 『삼국유사』 기록의 해석, 역사 텍스트의 정합성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 등을 통해 허왕후 설화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추론해낸다.



◆ 허구의 생명력은 진실보다 강하다

허왕후 스토리의 창작 윤색 과정은 그 자체로서는 물론이고 일반적으로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역사뿐 아니라 의료, 건강, 식품, 과학, 경제 분야에서도 거짓이 진실보다 더 잘 전파된다. 허구는 지어내는 사람과 수용하는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에 또 다른 ‘허왕후 허구’가 확산돼 자리 잡고 있다. 허왕후 스토리를 반면교사 삼아 그 가능성을 경계하고 이미 자리 잡은 오류는 솎아내야 한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막 활개를 펴는 또 다른 허구는 무엇인가?

허왕후 전설을 오늘에 되살린 이는 역사학자가 아닌 문인이었다. 아동문학가 이종기(1929~1995)는 1977년 『가락국탐사』라는 탐사문 형식의 창작물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펼쳐보였다. 이어 다른 창작물 『가야 공주 일본에 가다』에서 허왕후가 딸을 둘 낳았는데, 하나는 석태자의 비가 되고 다른 딸은 바다 건너 일본국을 세우고 비미호 여왕이 된다고 지어냈다.

놀라운 것은 이 창작을 학계에서조차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양상이다. 이종기 작가가 지어낸 얘기를 널리 전파한 학자가 고고인류학을 전공한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다. 김 교수는 1987년 「가락국 허황옥의 출자- 아유타국고(Ⅰ)」을 시작으로 허왕후를 다룬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근거 자료조차 밝히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종기의 창작을 윤색하고 발전시킨 논문이니, 근거 자료를 댈 수가 없긴 했다.

언론매체가 김 교수의 환상에 메가폰을 댔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매체가 김 교수를 인터뷰해 전설 따라 인도에서 가락국의 바닷길을 오갔다.

전설을 가설 삼은 과학적인 검증 시도도 나타났다. 서정선 서울대 의대 교수와 김종일 한림대 의대 교수팀은 2004년 허왕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고분의 왕족 유골을 분석한 결과 인도 등 남방계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됐다. (경향신문, 김수로왕 부인 인도인 가능성 매우 커, 2004.8.18.)

불교계와 우파 민족주의자, 김해 김씨 및 양천 허씨 가문이 가세했다. 일례로 동국대 불교대학원장 목정배 교수는 “황옥의 전설, 장유화상의 이야기, 쌍어문 그림, 이들은 숨길 수 없는 유구한 숨소리와 피살이 엉켜 있는 것”이라며 “한국 불교의 전래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정체성의 정치에 동원, 혐오에 악용될 위험

정치인이 빠질 리 없었다. 김해 김씨인 김종필과 김대중 두 정치인은 허왕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인도인과 주한 인도 대사를 초청해 대종회 행사를 치렀다.

허구는 인도로 건너가 전파됐다. 인도 북부 웃따르쁘라데시 주에 있는 아요디아 시에 2002년 허왕후 탄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돈은 가락중앙종친회가 댔다.

양국의 정치인과 외교관은 허왕후 신화를 한국과 인도의 선린 교류의 매개로 삼아 양국 간의 우호를 증진하자는 덕담을 나눈다. 주한 인도대사 나게시 라오 파르타사라티는 2007년 허왕후가 주인공인 역사소설 『비단황후』를 써내기도 했다.

인도에서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인도국민당이 2014년 집권했고, 인도 정부는 2015년 뉴델리에서 허왕후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1990년대 이후 광기를 분출해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고 무슬림을 학살하면서 고대사를 왜곡했다. 그 중심이 되는 지역이 허왕후의 고향이라는 아요디아가 있다. 허왕후 전설이 힌두 민족주의 정치에 악용될 위험이 있다.



◆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학자는 직무유기

허왕후 허구가 이토록 황당하게 부풀려지면서 대중을 사로잡기까지 한국의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이화, 이덕일 같은 재야 역사학자와 사이비 역사학자는 한몫하는 데 열심이었다.

실은 한국 역사학자들은 나설 역량이 없었다. 저자는 “현재 전국의 200개 가까이 되는 역사학과에 인도사를 전공하는 교수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인도 역사와 불교의 서술방식을 모르는 역사학자들은 허왕우 설화의 인도 내용이 그럴듯한지 판단하지 못했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사실로 여기는 데 대해 비판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써내도록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논문을 써서 역사적 사실을 학문적으로 밝혔으니 그로써 학자로서의 소임은 다 했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역사를 전공하는 지식인으로서 내가 수행해야 할 역할까지 마무리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연구는 논문으로 하더라도 시민 교육은 대중서를 통해서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앞서 1994년 「고대 인도-한국 문화 접촉에 관한 연구: 가락국 허왕후 설화를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해, 허왕후는 인도에서 오지 않았을 뿐더러 가공인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어 2003년에는 연구를 보완해 「가락국 허왕후 도래 설화의 재검토: 부산-경남 지역 불교 사찰 설화를 중심으로」를 내놓았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은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고 말했다. 허왕후 전설도 무서운 역사가 될 수 있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김해시청, 부산시, 푸른 역사]

[책 정보]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이광수 지음, 212쪽, 푸른 역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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