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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그해 5월 광주를 이렇게밖에 다룰 수 없었나
기사입력 :[ 2017-08-04 14:08 ]


‘택시운전사’, 지난 9년간의 역사적 퇴행이 빚은 암담한 한계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울었다는 간증이 나오고 있다. 불과 한세대 전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군인에 의해 죽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슬픈 것이 당연하다. 필자 역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를 보며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런데 <택시운전사>를 보면서는 다른 의미의 슬픔이 차올랐다. 지난 9년간 역사인식이 얼마나 뒷걸음질 치고 있었는지, 와 닿았기 때문이다. 한참 나아간 줄 알았는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의 암담함이 밀려왔다.



◆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당시에는 지역봉쇄와 언론통제, 그리고 유언비어 유포로 진실이 은폐되었지만 7년간 싸운 결과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 성과로 1988년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다. 그전까지 광주에서 직접 겪은 이들과, 죽고 다치고 투옥되어가며 진실을 알린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사람들끼리 공유했던 광주의 진실이 TV 청문회를 통해 만방에 알려졌다.

1989년에 만들어진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가 있었지만, 대중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최초로 재현한 작품은 1995년의 드라마 <모래시계>였다. TV 화면을 통해 광주의 그날을 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청문회를 통해 알고 있었던 진실이지만, 재현의 힘은 그만큼 컸다. 영화<꽃잎>(1996)은 광주시내에서 대규모 집회장면을 재현해가며 찍은 최초의 극영화였다. 그러나 광주의 진실을 왜 하필 정신이 아픈 소녀와 그 소녀의 몸을 착취하는 남성의 죄의식을 통해 그렸는지를 의아해하는 질문이 뒤따랐다. <박하사탕>(2000) 역시 시대의 아픔을 그린 좋은 영화였지만, 희생자들의 입장이 제대로 다루어지기 전에, 가해자의 상처를 다룬 작품이 먼저 도착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광주시민의 입장에서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나온 것은 2007년의 일이었다. <화려한 휴가>가 바로 그런 영화였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광주의 진실을 재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판단할 시대는 아니었다. 더구나 영화가 시민군의 관점을 담고 있으면서도, 저항이 아닌 무고한 희생자의 서사를 강조한 것은 뚜렷한 한계로 읽혔다. 오히려 같은 해에 나온 <오래된 정원>과 <스카우트>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영화의 일부일 뿐이지만, 그곳에서 싸웠던 사람들의 입장을 담고 있기에 의미가 있었다. 이후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나 <26년>(2012)에서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겪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삽화처럼 담겨있다. 그날의 사건이 논란되는 시기는 이미 지났으며, 세대를 넘어 객관적인 역사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컨대 30년 전 청문회를 통해 진실이 알려졌으며, 1995년 <모래시계>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여러 번 재현되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다는 것만으로 영화에 어떤 의미가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여기서 ‘어떻게’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얼마나 깊이 다루느냐, 둘째 얼마나 세련되게 다루느냐. <택시운전사>가 두 질문에 응답하는가. 그렇지 못하다. 영화는 외부인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데, 이러한 시선은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깊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면제의 자리를 부여한다. 둘째, 영화는 송강호를 활용하여 소시민이 각성해가는 서사를 그리는데, 이는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보았던 것이다. 즉 흥행이 검증된 안전한 기획일 뿐, 형식을 고민했다고 보긴 힘들다.



◆ 어리둥절한 외부인의 시선

영화 <택시운전사>는 봉쇄된 광주에 잠입하여 찍은 기록영상으로 진실을 외부에 알린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실화에서 출발한다. 그는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을 광주에 태워주고 동행했던 용감한 택시 운전사를 언급했다. 영화는 이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택시 운전사 김만섭(송강호)을 비추며 시작된다. 1970년대 중동에서 건설노동자로 5년간 일했던 그는 조국발전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있으며, 대학생들의 데모는 배부른 탓이라 여긴다. 아내가 죽은 뒤 홀로 어린 딸을 키우는 그는 셋방살이를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런 그가 기사식당에서 우연히 들은 ‘광주 왕복 10만원’이란 말에, 외국인 손님을 가로채 냅다 달린다. 광주에 무엇 하러 가는지, 광주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 일에는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짧은 영어로 손님과 몇 마디 주고받았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광주로 진입하는 길이 군인들에 의해 전부 막힌 것을 보고 뭔가 쌔 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10만원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산길을 통해 광주로 들어가는데 겨우 성공한다. 그런데 광주의 풍경이 이상하다. 도시의 일상이 정지된 채, 청년들이 트럭을 타고 돌아다닌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혼자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할머니를 도와주고, 광주 택시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직업윤리로 욕먹고, 급기야 낡은 택시가 정비 불량으로 퍼지는 바람에 발목이 잡힌다.

이후 영화는 광주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찍는 외신기자와 그를 따라다니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참상에 어리둥절한 택시 운전사의 모습을 담는다. 요컨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광주에 도착한 평범한 택시 운전사의 시선을 따라 그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외부인의 시선, 여기에 딱 맞는 배우가 있다. 평범한 아버지이자 소시민인 그가 역사의 현장에서 참혹한 사건을 목도하면서 윤리적 각성을 해나가는 서사,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양심과 존엄을 걸고 “이건 아니잖아요”라고 울먹이며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는 서사에 송강호는 ‘레디-메이드’ 배우이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괴물>을 거쳐 <변호인>에 이르기까지. <택시운전사>는 그 연장선에 놓여있는 영화이다. 송강호가 캐스팅된 순간 예상가능한 반복일 뿐이며, 새로움을 향한 가능성은 휘발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외부인의 시선이 지극히 한계적이라는 점이다. 정말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급격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스케치할 뿐,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그 맥락을 더 깊이 다루려하지 않는다. 백지 상태의 외부인이 질문하자 “모르겠어라. 우덜도 우덜한테 와 그라는지”라는 현지인의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 외신기자의 시선은 왜 살리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그 대답을 누구에게 들을 수 있을까. 외신기자는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의 맥락을 조금이라도 알지 않았을까. 영화는 그가 무슨 결심으로 광주에 왔는지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동경에 있던 그가 광주에 대한 전언을 접하고 광주행을 결심했을 때, 그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영화 <택시운전사>는 동경의 평온함을 그가 지루해 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 그를 움직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컨대 특종을 잡겠다는 속물적 욕망 때문인지, 역사의 현장에서 진실을 알리겠다는 저널리즘의 정신 때문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둘 다일 수도 있고, 별 생각 없이 하루 일정을 잡았을 수도 있다. 문제는 영화가 그에 대한 정보를 아끼는 탓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 결과 초반에 그가 광주에 가야 한다고 만섭을 재촉하거나 광주까지 와서도 택시비를 놓고 실랑이할 때, 그에게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다. 영화는 후반부에 그에게 “당신은 왜 기자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동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지만, “돈을 벌기 위해”라는 무성의한 대사가 기회를 서둘러 폐기한다.



외신기자는 만섭을 이곳에 데려온 원인제공자이자 사건의 성패를 쥐고 있는 주체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내면을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 그의 생각이 드러나야 할 장면에서 갓김치와 구멍 난 양말이 부각된다. 이를 통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광주에 온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두유 노우 김치?’에 답해야 되는 친근한 외국인으로 소비된다. 토마스 크레취만이라는 할리우드의 유명배우가 역할을 맡았지만, 그의 캐릭터는 재연배우의 캐릭터처럼 납작하다. 그 결과 목숨을 걸고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어 취재하는 그의 모습이 스테레오타입으로 보일 뿐, 어떤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택시운전사>가 그의 캐릭터를 잘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국의 정치 상황을 알고 있는 ‘외부인’으로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맥락과 역사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위상, 신군부의 집권, 제3세계에서 종종 일어나는 쿠데타 세력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지닌 저널리스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사태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다.

굳이 장광설을 펼 필요는 없다. 그때그때 적확한 지적만 해도 성공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또 다른 축일 수도 있는 외신기자의 시선을 용도폐기 한다. 그를 저널리스트가 아닌 납작한 등신대로 만들면서, 모든 시선의 축을 택시 운전사에 집중시킨다. 그 결과 광주는 맥락을 알 수 없는 피학의 스펙터클로 남는다.



◆ 다시 희생자의 위치로 퇴행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피학의 스펙터클로 기억하거나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으로 애도하는 것은 한계적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에 갇히기 때문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민군은 총을 들었고, 계엄군들과 교전을 벌이다 진압되었다. 정부와 언론이 총을 든 시민군을 향해 ‘폭도’라 부를 때, 그것이 왜 잘못된 말인지를 논파하지 못하고 무고한 희생자의 서사만 언급해선 안 된다. 그것은 논의가 진척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북한 개입설’ 같은 황당한 유언비어가 파고드는 틈을 제공한다.

이제 분명히 말해야 한다. 12.12 신군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계엄령을 선포했다. 전국으로 확대된 계엄령으로 정국이 얼어붙었지만, 광주의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나갔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잔인하게 짓밟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이때 광주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시민의 자위권을 침해한 국가 권력에 대해 광주시민들은 시민 저항권을 행사했으며, 이는 주권자의 이름으로 정당하다. 요컨대 시민을 향해 총을 쏘는 군인에 맞서, 시민이 무장을 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광주시민들을 학살당한 희생자로 애도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이 신군부의 총탄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덕에 민주화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 따라서 광주시민들은 시민 혁명의 주체이자 저항의 주체로 존경과 기림을 받아야 한다. 광주에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무고한 생명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민주시민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 숭고한 죽음을 맞은 이들도 있었고, 공권력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자율적으로 공동체를 돌보는 근원적인 질서도 있었다.

<택시 운전사>에도 잠깐 보이는 것들, 주먹밥을 건네는 사람들과 공짜 주유소, 그리고 무료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택시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질서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평소에 인간은 사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인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는 순간이 혁명의 시간이다. 그해 오월, 열흘간의 광주는 혁명의 시간이 도래한 해방구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할 때, 민중항쟁사의 관점에서 자랑스럽게 조명해야 될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택시운전사>는 오직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택시 운전사가 혁명의 시간을 경험하고 공동체적 대의를 생각하며 살게 된 ‘거듭남’을 그린다. 광주를 떠나던 그가 U턴 하는 순간과 에필로그로 담긴 광화문의 의미가 그것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지루한 편집과 평면적인 플롯에 묻혀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보긴 힘들다.

<택시운전사>의 한계는 9년간의 역사적 퇴행이 빚은 결과이기도 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한국사회의 합의를 뒤엎고 슬금슬금 후퇴한 결과, 이미 30년 전에 폐기되었던 ‘폭도’니 ‘빨갱이’니 ‘북한군’이니 하는 유언비어가 다시 등장하였다. 십 년 전 무고한 희생자의 서사는 이미 다루었으니, 해방구 광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진도에 맞지만, 9년간의 역사적 퇴행에 발목이 잡혀 다시 처음부터 말해야 되는 지난함. 영화의 느린 진행만큼이나 역사의 느린 행보가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택시 운전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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