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아이피’ 굳이 북한 로열패밀리를 살인마로 할 필요 있었나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브이아이피>에는 ‘연쇄살인범’과 ‘북한’이 등장한다. 잘 알지 못하기에 두려운 ‘타자’ 둘이 합쳐졌으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장르적으로도 <수사반장>과 <113 수사본부>가 합쳐진 셈이니, 두 배로 재미있지 않겠는가. 그래서일까. 경찰과 국정원이 같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종종 있다. <공조><비정규직 특수요원><용의자>등등. 그중 <공조>는 경찰, 국정원, 북한 경찰이 함께 등장하여 남북 공조수사라는 그럴듯한 소재를 활용한 영화였다. 하지만 코미디와 액션의 소재로 써먹었을 뿐, 진지한 접근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브이아이피>는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할만한 기획이다. 경찰, 국정원, 북한 경찰에 미국CIA까지 등장하여 연쇄살인범을 다룬다니, 당연히 재미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감흥이 빠르게 식는다. 인물들은 각자 논리로 움직일 뿐, 인물들 간의 관계가 성글기 짝이 없다. 인물들 간의 감정이 쌓이면서 서사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서사의 필요에 의해 인물들을 쓰고 버린다. 여기에 연쇄살인범에 대한 설정이나 범죄에 대한 지나친 묘사는 윤리적 비판의 지점을 갖는다.



◆ 절대악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다큐멘터리 <송환>의 앞부분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40년 이상 감옥에 있다가 1992년에 석방된 비전향 장기수가 이런 말을 한다. “난 화성 연쇄살인범이 누구인지, 그 안에 있으면서도 단박에 알겠던데.” ‘미군’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당시 한국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이 범죄가 한국 사회 내부에서 나온 게 아닐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 앞에서, 공동체의 외부를 상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한국에선 미군이나 간첩이, 미국에선 이슬람테러리스트나 외계인이 상상되는 식이다. <브이아이피> 역시 잔혹한 연쇄살인범에 대해 한국사회의 외부를 상상한 결과다.

박훈정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악마를 보았다>에는 악마가 사이코패쓰 미친놈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악마가 악마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진정한 힘은 관계에서 나온다. 즉 악마는 단지 미친놈이 아니라 권력을 지닌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가령 재벌 3세나 정치인 같은. 이러한 계급성에 위에 언급한 외부성을 합쳐보라. ‘북한의 로열패밀리’는 이 함수의 값이다. 그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미국이 관리하는 대상이라면 더 그럴듯하겠다.



영화는 2013년 현재 홍콩을 배경으로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이 작전을 수행하는 장면을 오프닝 시퀀스로 보여준다. 그리고는 5년 전 북한으로 배경을 옮긴다. 김광일(이종석)을 설명하기 위한 끔찍한 범죄 장면들이 등장하고, 다시 3년 후 서울로 건너뛴다. 즉 영화의 배경은 2008년 북한, 2011년 남한, 2013년 홍콩이다. 왜 하필 그 시점인가. 2011년은 김정일이 사망한 해이고, 2013년은 장성택이 처형된 해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북한의 정치적 변동에 맞춰 사건이 개진된다. 김광일의 위상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로열패밀리로 미국CIA와 국정원의 기획입국으로 남한에 온 김광일. 그는 입국한지 2년 만에 경기남부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그러나 경찰이 그를 수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국정원이 그를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고 미국에 넘겨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에서도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마음껏 범죄를 저지르며 살다가, 탈북 후 남한에 온 뒤에도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수사하지 못한다. 권력과 정보와 국제정치가 얽힌 탓이다.

그는 연쇄살인범의 역할을 떠맡기에 최적의 인물처럼 보인다. 가장 권력이 많은 자이자, 가장 낯선 타자이며, 어떠한 감정이입이나 공동체의 균열 없이 완벽하게 증오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공공의 적>에서 사이코패스는 ‘펀드매니저 패륜아’였다. 금융자본의 첨병이자 돈 때문에 부모도 죽여 버리는 인물을 ‘공공의 적’으로 삼았다. <베테랑>에서 공적은 ‘약쟁이 재벌3세’였다. 이는 각각 금융자본주의와 가족해체, 세습자본주의와 타락한 상류층에 대한 공분이 담긴 설정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품는다. 그렇다면 <브이아이피>의 북한 로열패밀리는 어떤가. 북한사회의 폐쇄성과 부조리, 한국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엿같음이 느껴질 뿐, 한국 사회 내부모순은 비판의 초점에서 벗어난다.



◆ 누구의 고통에 공감하는가?

그런데 김광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보면 한국사회의 모순이 발견된다. 박재혁을 비롯한 국정원 인사들은 범죄에 희생된 자국민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생각도 없이 오직 자기 조직보호에만 관심이 있다. 경찰인 채이도(김명민)는 살인범 잡기에 열을 올리지만, 그 이유가 희생자의 고통에 공감해서는 아니다. 그보다 ‘번개탄을 피우고 죽은 동료형사’에 대한 연민이 훨씬 크다. 그가 범죄의 순간이 담긴 동영상을 사람들 앞에서 틀어 보이는 장면에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찾아보긴 힘들다. 이 장면에서 채이도는 김광일의 발기부전을 비웃는다. 이는 특별히 예쁜 연쇄살인범의 얼굴과 더불어 남성성을 옹호하기 위한 장치로 읽힌다. 즉 김광일이 진정한 남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연쇄살인범과 남성성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희생자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두 기관, 국정원과 경찰이 기싸움을 벌인다. 자국민의 보호나 법의 수호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조직 수호와 인정투쟁을 위해서이다. 영화는 이러한 조직논리를 그대로 보여줄 뿐, 이를 비판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정원과 경찰의 밀고 당기기를 흥미롭게 중계하면서 당연한 현실인 듯 묘사한다.



두 기관의 줄다리기가 끝날 때 쯤 비로소 박재혁은 살인범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 박재혁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진정한 주인공이기에, 그가 어떤 감정을 품는지가 영화의 정서를 대변한다. 즉 내내 김광일을 보호하려던 박재혁이 분노를 품게 되는 계기가 중요하다. 앞서 무수히 많은 여성들의 참혹한 죽음에도 태연하던 그가 자신과 같은 남성 공무원의 죽음에 처음으로 분노를 느끼는 것을 어찌 보아야할까.

이는 채이도가 희생된 여성들의 고통이 아니라, 자살한 동료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재혁과 채이도는 생전에 어떤 교감도 없었으며, 업무상 대립하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채이도와 죽은 동료 사이에도 어떤 감정적 교류가 있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승진과 업무책임을 두고 경쟁관계였음이 암시될 뿐이다. 즉 영화 속 남성들은 친밀함이 없는 경쟁관계였지만,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남성’이라는 동질감으로 연대할 수 있으며, 동료가 죽으면 임무를 계승한다.



요컨대 영화는 잔혹하게 희생된 여성에 대한 공감보다 남성들 간의 희미한 동료의식을 훨씬 크게 그린다. 이는 영화가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살해당하는 여성을 필요이상으로 길고 자세하게 보여준 것과 관련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범죄에 희생된 여성의 고통에 공감했다면 이렇게 찍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범죄를 둘러싸고 인정투쟁을 벌이는 남성들의 심정에 공감했기에, 범죄를 최대한 열심히 볼거리로 만들었다. 즉 희생자에 대한 공감은 소거한 채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기싸움을 벌이던 국정원과 경찰처럼, 감독도 최대한 잔혹하게 재현한 것이다.

영화 <브이아이피>에서 그나마 희생된 자의 고통에 공감을 보이는 인물은 리대범(박희순)이다. 그는 희생된 여성의 시신을 보고 분노하고, 여성의 가족이 몰살된 것에 분노하며, 특히 어린이까지 희생된 것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가 남한에까지 와서 김광일의 수사를 은밀히 돕고 그를 북한으로 데려가려는 이유에는 자신의 가족과 부하가 희생된 것에 대한 원한과 북한에서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려는 욕망도 있다. 복잡한 동기와 감정을 지닌 인물이지만, 영화는 그를 기능적으로 다룬다. 그의 최후도 허무개그처럼 그려진다.



◆ 진짜로 여성들을 죽이는 것은 누구인가?

<브이아이피>를 최대한 선해하면 이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살인의 추억>이 연쇄살인범을 잡을 수 없었던 이유로 당시 한국사회의 전근대성과 비민주성을 제시한 것처럼, <브이아이피>도 연쇄살인범을 잡을 수 없는 이유로 경직된 남북관계와 미국의 영향 하에 놓인 한국이라는 국제관계 때문임을 제시한다고. 하지만 이런 교훈보다 훨씬 눈에 띄는 것은 잔혹하게 재현된 여성에 대한 학대와 남성연대의 그림자이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홍콩 장면에서 박재혁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이는 인물들 간에 오간 감정이나 내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다. 그저 채이도와 리대범이 못한 일을, 박재혁이 어떻게든 해낸다는 봉합일 뿐이다. 이는 악인을 처단하지 못하고 영화를 끝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관객들을 위한 서비스이다. 이것은 정의의 실현과 아무 관계가 없다.



장성택이 살아있을 때, 남북한 누구도 김광일을 처벌하지 못했다. 장성택이 숙청된 뒤, 미국은 중국의 묵인 하에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김광일을 제거한다. 남북한 내부의 부조리한 관료주의도 그대로이고, 남북한 사이의 긴장관계도 그대로이고, 한미 간의 종속적 관계도 그대로인 가운데, 끈 떨어진 신세가 된 김광일이 처리된다.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공정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국제적 파워게임에 의해 제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광일이 처벌받았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이는 채이도와 리대범을 대리해 박재혁이 그를 제거한다는 가상의 남성연대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카타르시스이다.

여자들이 잔혹하게 죽어가는 가운데, 이를 둘러싸고 각자 파워게임을 즐기던 남성들이 마지막엔 어찌됐든 제일 나쁜 놈이자 불량남자가 제거됐으니 괜찮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다. 괜찮지 않다. 남한의 여성들을 죽이는 살인마로 굳이 북한의 로열패밀리가 소환될 필요는 없다. 여성이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콘텐츠로 즐기며, 이를 둘러싼 파워게임을 통해 대리만족의 쾌감을 얻고, 희미한 남성연대에서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는 남성 중심문화가 현재의 범인과 미래의 범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브이아이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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