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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와 닮은 듯 전혀 다른 문소리의 ‘여배우는’
기사입력 :[ 2017-09-21 11:57 ]


‘여배우는 오늘도’, 여성들은 오늘도 꾹 참고 살아간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대학원에서 연출전공 과제로 만든 세편의 단편영화를 옴니버스 형태로 묶은 것이다. 세편은 따로 만들어졌지만 통일감이 높다. 영화는 여배우라는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으며, 상당한 수준의 유머를 구사한다.



◆ 왜 여배우인가?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시나리오와 감독과 주연을 맡은 극영화이다. 극중 캐릭터 이름도 문소리다. 즉 문소리가 문소리를 연기하며, 문소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문소리 캐릭터와 실제 문소리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배우가 자신을 연기하는 극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에서 배우들은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고현정은 고현정을, 윤여정은 윤여정을 연기했다. <여배우들>에서 여배우는 3인칭 관찰의 대상이었다. 엄청나게 예민하고, 견딜 수 없이 피곤한 존재들. 자의식이 높아서 다루기 까다롭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들. 영화는 홀로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여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견제와 경쟁이 폭발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그들의 매력들이 충돌하면서 기이한 균형점에 도달하는 모멘텀을 보여주었다. <여배우들>이 3인칭 적으로 여배우라는 종족을 인류학적으로 관찰하는 영화였다면, <여배우는 오늘도>는 1인칭 적으로 여배우인 자신에게 거울을 비추는 영화이다.



그런데 왜 여배우인가. 여배우는 무엇이 특별하기에 이렇게 영화를 통해 언급되는가. 여배우는 극단적으로 대상화되는 존재이자 예술적 주체이다. 즉 ‘아름다운 꽃’으로 여겨지는 대상이자, 자기세계를 만들어가는 예술가이다. 언제나 선택되어져야 하는 대상인 동시에, 필요에 따라 자신마저도 재구성해나가는 주체이다. 대상이자 주체인 간극 사이에 놓인 존재. 여배우에게는 언제나 ‘예뻐야 한다’는 요구와 ‘연기를 잘해야 된다’는 요구가 이중구속으로 따라붙는다. 또한 여배우는 화려한 판타지와 남루한 일상이 맞붙어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구나 현실에서 여배우를 만나면 환상의 동물을 보는 듯 신기해하지만, 그들 역시 짠 내나는 현실을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생활인들이다. 대상이자 주체, 판타지이자 현실이 교차하는 접점에 여배우의 실존이 놓인다.



◆ 대상 Vs. 주체, 판타지 Vs. 일상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3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1막은 캐스팅이 무산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친구들과 산행에 나섰다가 잘나가는 제작자 일행과 만나 술자리를 갖고 돌아오는 여정을 담는다. 2막은 엄마이자 딸이자 며느리이기도 한 여배우의 생활인으로서의 일상을 담는다. 3막은 지인의 장례식장에서 맞닥뜨린 소동을 통해 예술에 대한 소회를 담는다.

영화는 ‘여배우’의 모순을 흥미롭게 조명한다. 1막에서는 대상이자 주체인 여배우의 분열지점을 보여준다. 갈수록 배역을 맡기 어려운 여배우의 불안이 전면에 깔리는 가운데, 술자리에서 여배우를 앞에 두고 펼쳐지는 ‘아무 말 대잔치’를 보여준다. 술자리를 갖게 된 이유로 캐스팅에 대한 욕망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며 추어주는 친구의 말이 문소리의 높은 자의식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현실의 비굴함과 충돌을 일으키며 문소리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불쾌함은 원하던 감독의 캐스팅 제의 한마디에 날아갈 정도로 가벼운 것이다. 이는 여배우의 불안과 욕망이 지극히 속물적임을 보여주지만, 비루하거나 냉소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웃음과 공감이 묻어난다.



2막에서는 화려한 판타지와 일상의 영위가 충돌을 일으킨다. 대출 때문에 은행을 찾은 문소리는 VIP 라운지에서 직원들에게 줄 사인을 꼼꼼하게 한다. 시사회 대신 치과를 찾은 문소리는 가족할인을 위해 치과의사와 사진을 찍는다. TV에 나오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문소리를 보고 “엄마다”라고 하는 딸에게 “엄마 아니야”라 말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레드카펫의 여배우 문소리와 집에서 딸과 마주한 엄마 문소리는 동일인물인가 아닌가. 선글라스, 화장, 헤어로 자신이거나 자신이 아닌 얼굴로 사는 여배우들.

돈 안 되는 독립영화 출연을 거절하기 위해 화장을 지운 채 만났다가 오히려 딱 원하는 얼굴이라는 말로 발목이 잡힌 문소리는 술을 퍼마신다. 만취해서 들어온 문소리에게 남편이 “힘들면 뭔가를 줄이라”고 말하자, 문소리는 반문한다. 며느리 노릇도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영화도 조금밖에 찍지 않는데 무엇을 더 줄여야 하냐고. 남편의 허를 찌르는 대답이 아니더라도, 이 장면은 충분히 역설적이다. 문소리는 자신의 힘듦을 과장하지도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며느리 노릇,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힘들다. 일이 적어서 오히려 힘들다. 힘들어서 술을 먹으니 더 힘들다.



◆ 예술에 대한 반문

3막의 장례식 장면은 문소리가 예술에 대해 품고 있는 단상이 담겨있다. 14년 전 함께 영화를 찍었지만, 이후 영화를 만들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은 감독의 빈소를 찾아가면서 문소리는 집에서 준비한 축의금보다 부랴부랴 돈을 더 넣는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빈소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선배 배우는 문소리를 보자 “스타가 된 뒤, 재수가 없다”며 열등감을 폭발한다. 원치 않는 대화를 이어가던 중 감독의 죽음을 누구보다 애통해하는 젊은 여배우를 본다. 그가 말하는 감독과 함께 했던 시간들. 재능 없는 감독이 신인 여배우에게 온갖 허세를 떨어가며 헛꿈을 키워주었으려니 생각이 미칠 때 쯤, 상황은 폭력적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영화판에서 흔히 일어나는 추문을 소동처럼 비추며, “예술가가 작품으로 보여주어야지 술자리 환담으로 풀어내면 그건 한량일 뿐”이라는 문소리의 뼈있는 한마디를 들려준다. 그리곤 죽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못한 시간동안 찍었던 영상들을 문소리가 보는 고즈넉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감독이 남긴 짧은 영상들은 영화의 원형과 본질이 무엇인지 감각적으로 일깨운다. 공원묘지까지 동행하게 된 젊은 여배우가 문소리에게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나” 묻는다. “그냥 잘할 때까지 하는 것”이라는 그의 대답은 가장 힘이 되는 대답이 아니었을까.



3막의 장면들은 홍상수의 영화를 많이 상기시킨다. 감독의 장례식에 모인 배우들이라는 설정, 후배를 시기하는 선배, 여배우를 욕망하는 감독, 배우들끼리 펼치는 예술에 대한 갑론을박 등. 그러나 홍상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이것은 감독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들이 여배우를 향한 감독의 욕망을 남성(감독과 그 감독의 후배 등등)의 입장에서 지질하게 풀어낸 것이라면, 문소리의 영화는 여배우를 향한 감독의 욕망을 여성(배우들과 감독의 부인)의 입장에서 시큰하게 풀어낸 것이다. 젊은 여배우와 드잡이 질을 한 감독의 부인이 담담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듯이, 젊은 여배우와 언성을 높인 문소리도 담담하게 해장국을 먹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입장과 연대는 여성감독이 아니라면 그리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 여성으로 산다는 것

여성감독의 입지는 물론이고 여배우의 위상마저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지금, 여성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지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성감독과 여배우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늘리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이다. 문소리는 스스로 그 기회를 만들어 필요성을 입증했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재치 있는 화면구성으로 상당한 재미와 완성도를 지닌다. 그중에서도 가장 칭찬할만한 것은 자기반영적인 이야기를 하되, 건강한 자기객관화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해나간다는 점이다. 여기서 보편성은 ‘배우’가 아니라 ‘여배우’로 불릴 수밖에 없는 젠더적 질곡을 포함한다. 영화는 ‘한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은’을 부제로 삼을 만한 문제의식을 지니는데, 이는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불안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만한 점을 갖는다.

요컨대 여배우만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적 불평등 속에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고군분투한다. 화장을 했다 지웠다 하며, 어이없는 외모 품평을 해대는 아저씨들 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웃는다.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며 내달리고픈 마음을 꾹 참고 “연기하면서” 살아간다. 여성들은 오늘도!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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