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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캔스피크’, 위안부 피해자 폄하하는 세력들 꼭 보시라
기사입력 :[ 2017-09-27 14:25 ]


‘아이 캔 스피크’, 마음을 열면 타인의 고통에 연대할 수 있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아이 캔 스피크” 이 말은 중의적이다. 첫째는 “아이 캔 스피크 잉글리쉬”로 쓰이는 언어구사의 뜻이 있고, 둘째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대변되는 ‘증언’의 뜻이 있다. 이 대사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딱 한번 등장한다. 미 하원 청문회에 선 옥분(나문희)가 어질어질 떨리는 순간을 딛고 불안과 불신의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좌중을 향해 입을 떼었을 때이다. 그는 이후 준비해간 영어 연설 대신 한국어로 자신의 몸에 새겨진 역사의 상흔을 증언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서 친구가 초안을 쓰고 자신이 연습해온 영어 연설을 들려준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미학과 윤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첫째는 ‘말하다’ 혹은 ‘언어’의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둘째는 ‘피해자 스스로 말하기’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하고 기다리는 태도를 견지하며, 셋째는 자신의 증언에 친구의 증언을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연대의 힘’을 말한다.



◆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합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초반의 옥분은 ‘민원왕’ 이다. 20년간 8천여 건의 민원을 내는 것은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증거사진을 찍어야 하고, 양식에 맞춰 내용을 적어야 한다. 옥분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고, 새로 온 직원 민재(이제훈)가 더 엄격한 절차를 요구하면 거기에 맞춰서 낼 정도로 열심이다. 그의 열혈 민원활동은 국가 혹은 공동체에 대한 ‘말 걸기’에 해당된다. (남들은 “정신병자”라고 뒷말을 할지언정) 그는 나름 이웃의 이익을 대변해서 정부에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폐기된 서류뭉치로 대변되듯 번번이 묵살 당한다.

옥분이 민재와 본격적으로 엮이게 된 계기는 ‘영어 배우기’다. 옥분이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는 첫째, 어려서 미국에 간 남동생과 통화하고 싶고, 둘째, 친구 정심(손숙)이 준비해온 영어연설을 대신하기 위함이다.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동생의 존재는 혈육과의 소통 단절을 뜻한다. 치매에 걸린 정심도 ‘언어를 잃어가는’ 것으로 읽힌다. 즉 옥분이 영어를 배우려는 것은 ‘소통의 수단’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태원 술집에서 처음 보는 외국인과 영어로 말을 트는 장면이 보여주듯, 영화는 ‘언어구사’의 측면 (“아이 캔 스피크 잉글리시”)을 밝게 담는다.



그런데 ‘언어’를 익히는 것이 곧 ‘소통’의 성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소통의 부차적인 수단이다. 민재가 영어로 자기 이야기를 했을 때, 옥분은 “그런 슬픈 일이 있었구나”라 말한다. 다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말투만 들어도, 슬픈 이야기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민재가 옥분의 남동생에게 전화했을 때, 남동생은 거부 의사를 밝힌다. 언어구사가 문제가 아니라 소통 의지가 진짜 문제다. 청문회 연설 장면에서도 옥분이 한국어와 영어로 연설하는 것은 전혀 소통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소통의 의지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옥분의 영어 배우기를 코미디로 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통의 의지임을 놓치지 않고 후반의 드라마를 밀어붙인다. 옥분이 말하기의 주체가 되는 과정, 즉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역사의 증언을 쏟아내는 발화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강박적인 민원으로 공동체와 소통하려 하였으나, ‘정신병자’ 소리를 들어야 했던 하위주체가, 자신이 부인해 왔던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정돈된 언어를 통해 발언하는 주체가 되는 과정이 영화 속에 먹먹하게 들어있다.



◆ 피해자가 증언자가 되기까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최대 미덕은 위안부 피해자를 ‘순결을 빼앗긴 가련한 소녀-희생자’로 그리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는 용감한 할머니-주체’로 그린 것이다. 희생자와 증언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이를 뛰어넘으려면 존재를 건 도약이 필요하다.

증언자가 되려면 일단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커밍아웃’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당한 피해의 경험을 개인의 수치가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여전히 존재하는 편견이나 음해에 맞서 싸울 만큼 튼튼한 자아가 있어야 한다. 옥분은 정심과 달리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숨겨왔다. 왜 그랬을까. 그는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의 망신으로 여겨지며 엄마에게조차 지지나 위로를 받지 못했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말하지 말 것을 강요했고, 남동생 앞길에 누가 될까 전전긍긍했다. 물론 이러한 가족의 태도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통념을 반영한 결과이다.



옥분이 ‘커밍아웃’을 결심한 계기에는 남동생의 거부의사를 확인한 것도 일부 기여했다. 그는 희미한 억압으로 존재하였던 가족을 내려놓고, 함께 고통을 겪은 친구의 손을 굳건히 잡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엄마보다 정심이가, 정심이보다 내가 더 중하니까.”) 정대협 활동가(김소진)는 옥분이 결심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이러한 기다림은 미국의 청문회 장에서도 그대로 견지된다. 옥분의 자격과 신빙성을 문제 삼는 외국 인사들 앞에서 그의 발언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어지러운 정신을 스스로 수습하고 자신의 몸에 새겨진 역사적 상흔을 내보이고 증언을 이어가는 동안, 오롯이 혼자서 그 무게를 견뎌야한다. 역사적 증언이 힘든 이유는 숨기고 싶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가해자와의 싸움이기도 한 까닭이다. 청문회장의 일본 대표가 보여주는 태도가 이를 대변한다. 옥분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받아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위안부 피해자의 참혹한 과거 피해를 강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의 증언자로 살아가는 현재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의 주체성을 똑바로 보여줌으로써 ‘불쌍한 피해자 할머니를 내세워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박유하 류의 음해나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지 않냐’는 폄하나 진실규명이나 사죄보다 피해보상에 초점을 맞추는 작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 연대의 가능성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가장 눈물 나는 장면은 진주댁과 해후하는 장면이다. 옥분이 커밍아웃한 뒤 옥분을 피하던 진주댁에게 “나처럼 험한 과거를 지닌 사람과는 친구하고 싶지 않다는 거냐?”고 묻는다. 그러나 진주댁은 의외의 대답을 들려준다. 옥분은 엄마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속 깊은 위로를 진주댁에게 듣는다. 오해와 갈등을 겪었던 족발집 주인과의 화해도 눈물겹다.

옥분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정심이었다. 옥분이 증언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정심의 일을 대리하려는 것이다. 정심을 지탱해준 것은 정대협 활동가였고, 옥분 역시 활동가와 신뢰 관계를 이어나간다. 옥분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민재 형제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청문회장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 증언자의 손을 잡는 모습에서 보듯이, 여성들의 연대는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다.



옥분과의 관계에서 민재 역시 성장한다. 영화에서 민재는 조력자의 위치에 놓이는데, 그의 가장 중요한 대사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이다. 그는 자신의 무심함을 진정으로 사과한다. 그의 사과에는 ‘뒤늦게 알게 된 후 갖는 미안함’이 담겨있다. 이는 김현석 감독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서이다. 김현석 감독은 아기자기한 코미디를 풀어가다가 뒤늦은 각성과 미안함을 폭발적으로 담는다.

<스카우트>에서 야구선수를 스카우트하려는 좌충우돌을 보여주다가, 광주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뒤늦게 잘못을 깨닫는 주인공의 각성을 담는다. 영화는 폭력에 동원된 자의 죄의식과 시대의 폭력으로 인해 파탄난 관계의 속살을 드러낸다. <쎄시봉> 역시 마찬가지이다. 회고적인 화면 속에서 웃고 노래하는 장면을 낭만적으로 보여주다가, 친구들을 고발하고 폭력에 부역했다는 자책감에 무너지는 주인공의 회한을 담는다. 영화는 국가폭력에 비겁하게 굴복하였던 자의 자괴감을 보여주면서, 가담자이자 방관자로 살았던 세대의 이지러진 내면을 드러낸다.



<아이 캔 스피크>의 민재는 김현석의 전작들에 비해 윤리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민원을 들어주는 척 건설자본에 유리한 행정을 펴는데 일조하고, 옥분의 가족관계가 꺼림칙하여 거짓말로 관계를 끝내려다가 잔인한 말을 퍼붓는 등 잘못을 저지른다. 감독의 전작이라면 민재는 죄의식을 느낀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과하고 옥분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감독의 전작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짝사랑의 주체였던 것과 달리, 민재는 짝사랑의 대상이면서도 이성애에 연연하지 않은 채 옥분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원칙과 절차만을 중시하던 그가 전략적으로 구청장을 설득하기도 하고 유연한 행정을 구사하는 등 성숙함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옥분이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능력과 관계의 확장을 뜻한다. 아무와도 연루되지 않은 채 동생이나 돌보며 살아가려 했던 민재가 옥분과 가족이 되었듯이, 마음을 열면 타인의 고통에 연대할 수 있다. 위 캔 두 잇.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아이 캔 스피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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