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 감독의 아주 영리한 선택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실생활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감독/작가 김현석은 오글거림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비극적인 한국 역사를 다루면서도 그처럼 노골적인 비분강개에 빠지지 않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드물다. 종종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아직까지 <스카우트>는 1980년 광주를 그린 가장 훌륭한 충무로 영화인데, 그건 그가 이 비극의 시대를 직접 그리는 대신 선동렬 스카우트라는 소재와 결합해 서글픈 코미디로 만든다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냈기 때문이다. 자칫 무례할 수도 있는 영화인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감독/작가 김현석은 자신이 다루는 캐릭터와 사건들에게 무례하지 않으며 그 우회로를 통해 다른 영화들이 뻣뻣한 비분강개에 갇혀 다루지 못하는 역사 속 개인의 비극을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석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가 깊게 몰입할 수 있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잘 그리는 멜로 작가라는 것이다. 이 테크닉은 분명 장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어쩔 수 없는 한계선을 긋는다. <스카우트>만 해도 남자주인공에게 그렇게 감정이입하는 대신 몇 걸음 떨어져 볼 수 있는 냉정함을 유지했다면 영화는 훨씬 좋아졌을 것이고 그 과정 중 더 나은 결말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알탕영화를 만들지 않으며 그의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생생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이지만 그가 만드는 ‘남자 멜로드라마’에서는 영화의 핵심에 도달하는 길 앞에 있는 마지막에 남아 있는 얇은 막을 뚫지 못한다.



그의 신작 <아이 캔 스피크>는 그 마지막 막을 뚫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아이 캔 스피크>는 더 이상 남자 영화가 아니다. 이제훈의 캐릭터 민재가 남자주인공으로서 영화의 문을 열고 영화 내내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나문희가 연기하는 옥분이며 영화는 옥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옥분은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인물이지만 과거의 또는 잠재적 연애대상으로서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옥분은 영화 속에서 존재하기 위해 남자 주인공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민재야 말로 옥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위치 전환이 일어났고 그 결과는 긍정적이다. 일단 김현석이 남자 주인공을 통해 애절한 자기연민을 시전할 통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이미 독자들은 <아이 캔 스피크>가 위안부 생존자들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사전정보 없이 보았을 때 가장 효과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옥분은 위안부 생존자지만 그 사실은 영화 중반을 넘긴 뒤에야 밝혀진다. 김현석은 다들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위안부’라는 정보를 차단하고 옥분의 캐릭터를 그린다. 그 과정은 전형적인 김현석식 사람 좋은 코미디여서 관객들은 대부분 편안하게 앉아 괴짜 할머니와 고지식한 구청 공무원이 티격태격거리는 것을 보면서 옥분의 개성을 받아들인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위안부 정보를 터트렸을 때, 옥분은 이미 완성된 인물이다. 과거에 끔찍한 폭행을 겪은 가련한 누이의 막연한 이미지가 아닌 현재를 살며 현재 속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있는 노인이다. 이 과정을 통한 관객들은 옥분을 ‘위안부 생존자’의 고정된 틀에 넣으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그 결과 옥분과 옥분의 경험은 일반화의 막연함을 극복하고 훨씬 강렬한 드라마로 완성된다.

김현석이 혁명적인 시도를 한 건 아니다. 이미 이나정이 현재를 살며 지금의 젊은이들과 꾸준히 소통을 시도하는 위안부 생존자를 다룬 <눈길>을 만들었다. <아이 캔 스피크>의 많은 장면들은 실제로 <눈길>과 많이 겹친다. 변영주 이후 이 인물들의 현재형의 삶을 그린 수많은 다큐멘터리들이 나오기도 했다.



김현석은 그냥 자신이 그 안에서 편안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을 갖고 이 인물을 다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낸 것이다. 이 길이 최선의 길인가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하지만 최선의 길을 하나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같은 소재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다른 길을 찾는 것이다. 역사의 비극을 일반화의 과정을 거쳐 평면화하지 않으려면 우린 다른 관점과 접근법을 통한 수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아이 캔 스피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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