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처럼 순수하지만 새로울 건 없어 맥빠지는 ‘유리정원’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유리정원>은 부산영화제 개막작이자 문근영 주연의 영화로 화제가 됐다. <마돈나><명왕성> 등 짙은 사회성과 비판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만들었던 신수원 감독의 신작이라 더욱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개봉된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맥빠진 모양새이다. 창녕 우포늪에서 촬영한 숲이 초록의 생동감을 전하며 신비한 영상미를 풍기지만, 영화의 서사와 주제에 몰입하기는 힘들다. 영화는 장르적 긴장을 살리지 못한 채 밋밋한 전개를 이어가는데, 뭔가 순문학적인 상상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빚어질 법한 패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나무-되기’의 상상은 별로 새롭지 않다네

영화 <유리정원>은 스스로 나무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재연(문근영)에 대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숲에서 태어났다....나무의 뿌리에서 아기가 태어났다....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몸속엔 초록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말은 단순히 은유로 끝나지 않는다. 재연은 인간의 적혈구에 식물의 엽록체를 이식하는 연구를 하는 생명공학도이다. 재연은 인간이 나무처럼 광합성을 통해 산소와 에너지를 얻는 미래를 꿈꾸며 연구에 매진한다. 그러나 재연은 아이디어와 연구 실적을 후배에게 빼앗긴다. 지도교수이자 연인이라 믿었던 남자(서태화)에게 배신당한 재연은 연구실을 나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숲으로 들어간다. 숲 속에서 혼자 연구를 계속하던 재연을 누군가 찾아온다.

<유리정원>은 자신을 나무와 동일시하며 나무가 되기를 갈망하는 재연을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인 인간과 나무를 등치시키는 상상이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특히 “나무는 서로 침범하지 않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암시하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나무’ 나 “녹혈구는 산소를 운반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란 말이 의미하는 ‘자기충족적인 나무’의 이미지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이미 조목한 바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려온 영혜는 동물을 잔인하게 죽여 고기를 얻는 인간의 폭력성에 거부감을 느끼며 ‘채식’을 선언한다. 영혜는 비정상으로 낙인찍혀 가족에게 버림받지만, ‘채식주의자’로서의 거부는 점점 뚜렷해진다. 요리도 성관계도 거부하던 영혜는 마침내 햇빛과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꽃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요컨대 인간의 폭력성에 환멸을 느낀 젊은 여성이 사회와 고립된 채 나무가 되려는 욕망을 품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채식주의자>에서 나왔다. 물론 영화는 소설과 달라서, 영화만 구현할 수 있는 표현법들이 있다. 그런데 <유리정원>이 그것을 매우 잘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재연이 연구하는 혈관들을 나뭇가지처럼 뻗어가는 모습으로 보여주거나, 고목과 늪을 품은 숲의 괴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영상미가 있다. 특히 나뭇가지들이 서로 겹치지 않고 하늘을 가득 채운 광경이나 초록빛으로 가득한 숲속 연구실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영화의 결정적 이미지라 할 만한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에게 쫓기다 마침내 나무가 된 재연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프네’를 떠올리게 한다. 아폴론의 폭력적인 구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다가 월계수가 된 다프네의 이미지는 굉장히 익숙한 도상이다. 또한 ‘초록 피’ 실험을 하는 앳되고 순수한 재연의 얼굴은 2000년대 초 TTL 소녀 임은경을 모델로 내세운 ‘파란 피’ 광고를 떠올리게 한다. 즉 주제의 측면에서도 이미지의 측면에서도 그리 새로울 게 없는 것이다.



◆ ‘자라지 못한 한쪽 다리’ 라는 상징

재연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혹자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어 죽어버린 <마돈나>의 여주인공과 달리 재연이 영화 <미저리>를 연상시키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뭔가 주체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영화가 재연을 성실한 과학도로 묘사하는 점은 신선하다.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사유하지 않고, 냉철한 지성과 이상을 지닌 주체이자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그린 작품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들여다보면 그에게 뒤틀린 성적 욕망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재연을 장애여성으로 그린다. 영화에서 다양한 장애인을 보여주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장애를 그런 용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재연을 훔쳐보는 소설가(김태훈)에게 ‘뇌혈관의 문제로 몸이 굳어지는 병’이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이다. 재연은 한쪽 하체가 12살 이후 자라지 않아 가늘고 짧은 다리를 지녔고 절뚝거리는데, 이러한 설정은 재연의 (성적) 미성숙과 (인격적) 불균형, 그리고 (관계) 결핍을 암시한다.



재연이 교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은 처음 만났을 때 앞질러 걷지 않고 보폭을 맞추어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재연이 ‘징그럽게’ 여기는 덜 자란 발과 다리에 사랑스러운 손길을 준다. 재연은 교수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는 재연이 교수를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재연은 자신이 순수한 마음과 성실한 연구로 교수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후배로 인해 깨진다. 교수가 원하는 것은 늘씬한 후배의 몸이었고, 약삭빠른 후배의 처신이었다. 후배의 교성이 들리는 교수의 집 마당에서 재연이 후배의 하이힐을 신고 위태롭게 걷는 장면은 재연이 후배의 섹슈얼리티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2살 이후 한쪽 하체가 자라지 못했다는 암시는 배우 문근영을 통해 증폭된다. 아역배우 출신으로 심하게 동안인 문근영에게 또래 성인여성들이 가진 섹슈얼리티를 찾기 어렵다. 무성적인 소녀의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장애 설정이나 문근영의 캐스팅은 재연의 섹슈얼리티적 결핍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 재연이 교수와 사적 관계를 맺어가며 성공을 꿈꾸다가 후배에게 자리를 빼앗기는데, 이때 재연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놀라거나 분개하지 않는다. 교수와 성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연구실에서 부당한 이권을 얻는 후배에게 재연이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재연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뜻이 된다.



<마돈나>에도 직장상사와 연애관계를 맺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병원에서 의사와 성관계를 맺는 간호사, 콜센터 관리직과 연애하는 상담원 등. 영화는 직장 내 이러한 관계들을 보여주며 남성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권력을 지닌 남성과 자발적으로 관계 맺기를 원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즉 직장에서 ‘소파 승진’을 원하는 여성들이 많지만 아무나 성공할 수 없기에, 성적인 매력이 없는 여성은 성적인 매력이 있는 여성을 부러워하게 된다는 생각이 영화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유리정원>도 마찬가지다. 재연이 후배를 부러워하는 것에는 교수와 학생이 사적관계를 맺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다. 누구나 능력만 된다면 교수와 연애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깔려 있다. 성실한 여성 과학도를 주인공으로 삼은 텍스트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결국 연구 성과보다도 교수의 애인이자 애제자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여성들과, 성적 매력의 결핍을 신체장애로 등치시키며 애잔하게 그리는 이성애 중심적 시선이 존재한다.



◆ 스토킹, 여성의 삶을 절취하는 남성

영화 <유리정원>의 또 다른 축인 소설가는 우연히 재연의 글과 그림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 재연을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재연이 사는 곳을 훔쳐보고 수첩을 훔쳐간다. 들킨 그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라고 응수한다. 얼마나 더 이상한 짓을 해야 이상한 사람일까. 스토킹에 대해 관대한 것은 소설가만이 아니다. 수첩을 훔쳐갔음을 알게 된 재연이 소설가를 찾아가 따지나 했더니, “그 소설을 계속 써 달라”고 말한다. 재연은 교수와 춤추는 환상에 이어, 소설가와 춤추는 환상을 이어간다. 이는 재연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소설가를 연인으로 받아들였음을 암시한다.

스토킹의 피해자가 스토킹 가해자에게 “계속 소설을 써 달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스스로 스토킹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는 엽기적인 생체실험을 하는 ‘미친 과학자’ 반열에 오르는 여성인가 싶었지만, 별로 그렇지 못하다. 그보다 재연은 소설가의 눈에 비친 자신, 그럴듯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재탄생된 자신에 대해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을 얻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처음에 “그녀는 숲에서 태어났다....초록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문구도 재연의 목소리가 아니라 소설가의 목소리로 읽은 나레이션이다. 남자에 의해 관찰되고 기술되는 자신에게 흡족함을 느끼는 것은 그가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자신에게 익숙하다는 뜻이다.



남성-주체, 여성-대상의 구도가 그대로인 셈인데,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뻔하다. 재연을 콘텐츠로 삼아 쓴 소설은 대박이 나고, 재연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여성은 콘텐츠로 소비되고, 남성은 작가로 성공한다. 이것은 로맨틱 코미디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똘끼’를 지닌 그녀는 견우가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하기 위한 콘텐츠가 된다. 정작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녀는 2년 후 평범해진다. 풍부한 정신세계를 지닌 여성이 콘텐츠로 소비된 후 평범해지거나 자멸하고, 그 콘텐츠를 이용한 남성이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예는 드물지 않다.

<유리정원> 속 소설이 대박을 친 이유는 뭘까. 그저 나무에서 태어났느니 어쨌느니로 시작하는 몽롱한 이야기에 문학적 흥미가 유발되어 대박을 쳤을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여조교가 남교수를 납치하여 복수로 생체실험을 하여 괴상한 변사체를 만들었다는 엽기적인 사건을 실화로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한 흥미를 유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도 그 대목을 중심에 두고 밀도 있는 수사극으로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영화가 한갓진 문학질을 해대는 것이 아니라, 몰아치는 전개와 촘촘한 편집으로 긴장을 끌고 가면서 문학이 아닌 영화로만 할 수 있는 장르의 미학을 구사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요컨대 <유리정원>은 장르와 시대, 두 가지 측면에서 착오적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여성작가의 소설로 나왔으면 걸맞았을 주제와 감성이 2017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영글지 못한 관념의 향연이 철지난 감성처럼 나부낀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유리정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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