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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됐을까
기사입력 :[ 2017-11-08 09:58 ]


일본의 에도시대, 서구의 르네상스 버금가는 전환의 시기
메이지유신 전 근세 일본은 ‘축적의 시대’…그 기반은 무엇일까?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에 성공하여 국력을 키웠지만, 조선은 근대화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일본에 주권을 찬탈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됐을까?”

일본통 외교관 출신인 저자는 이를 “흔히 볼 수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소개한 뒤 이 서술에는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대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인 에도시대 약 260년 동안 근대화를 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는 ‘정답’을 내놓는다. 에도시대는 17세기 초반 에도(현 도쿄)에 막부가 들어선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까지를 가리킨다. 그는 “에도시대는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시대에 버금가는 전환의 시대였고 축적의 시대였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일본 근대화의 성공은 근세기의 축적이 서구와의 전면적 조우를 맞아 요즘 말로 하면 ‘포텐이 터진’ 결과”라고 설명한다.

◆ 260년 동안 근대화를 위한 역량 갖춰

에도시대의 축적과 변화를 저자는 관광, 출판, 교육, 신문〮광고업, 의학, 지도, 사전, 섬유〮의류산업, 도자기, 상인도(商人道) 가치관 형성, 화폐제도 발달 등으로 나눠 서술한다. 그는 이런 ‘생활문화사적 접근’을 통해 일본이 근대로 들어서는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근대성을 ‘권위와 시장 간의 긴장’, ‘경제의 분화와 전문화’, ‘인적〮물적 이동성의 확대’ 등이 두드러지는 패러다임으로 정의한다면, 일본의 근세(에도시대)는 엄청나게 ‘드라마틱’하고 ‘익사이팅’한 시대라고 말한다.

“에도시대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식은 진공에 가깝다.” 저자는 한국인의 일본 역사에 대한 관심은 센고쿠(戰國) 시대의 영웅군담 스토리, 막말(幕末) 지사들의 네이션 빌딩 스토리,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르는 전쟁 스토리에 집중된다고 본다. 일본 역사를 상당히 접한 독자에게도 이 책의 18개 장 중에서 몇 대목은 생소할 듯하다. 많은 독자는 조선과 비교한 일본의 근세에 놀라고, 일본 근세의 역동성과 대조되는 조선의 정체를 돌아볼 될 것이다.

이 책에 차려진 다채롭고 풍부한 내용을 전하는 건 이 서평의 역할이 아니다. 무릇 서평은 독자의 책읽기를 돕는 맥락이나 배경지식, 책을 보완하는 내용, 저자의 서술과 상충하는 사실 등을 전해야 한다. 이 서평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과 함께 내가 생각하는 답을 제시한다. 독자께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문답을 검증해보는 지적 재미도 누리기 바란다.

◆ 조선과 일본을 가른 요인은 상업

“에도시대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축적과 변화를 꿰는 기반은 무엇이었나? 즉, 조선에는 없었고 일본에는 있었던 무엇으로 인해 에도시대에는 그렇게 많은 축적과 변화가 이뤄졌나?”

답은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에도시대 막부체제에서 각 번(藩)이 경쟁하면서 부국강병을 꾀한 봉건체제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체제는 역사가 일본과 전혀 다른 조선이 도입해 시행하지 못할 종류였다.

내가 생각하는 다른 답은 시장의 확대, 즉 상업의 발달이다. 일본은 막부와 일부 번이 교역에 적극적이었고, 국내 상업의 발달을 허용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면서 일본에 막대한 부를 안겨준 것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무역과 유통은 시장을 키우고 확대된 시장은 분업을 촉진한다. 분업에서 전문화가 이뤄지고 전문화된 분야는 지식과 기술이 더 빠르게 축적한다. 시장이 커지면서 보이게 된 전보다 더 큰 이윤의 기회는 혁신을 자극한다. 유럽이 대항해시대에 경험한 이 과정을 일본은 에도시대에 밟아갔다.

일본의 막부와 번이 제한적으로나마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역을 하는 동안 조선은 문을 닫아걸었다. 일본이 도공을 끌고가 도자기로 부를 쌓는 일은 조선 선비들한테는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조선은 상업과 이윤 창출을 가장 천한 일로 여겼다. 조선은 개국할 때 내건 사농공상의 가치를 끝까지 고수했다. 고려와의 차별화에 집착해서였을까.

◆ 조선엔 책이 없었다...근세 일본은 출판 강국

시장이 없으면 무엇을 만들어도 쓰이지 않는다. 만든 결과물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만들 유인이 줄어들게 된다. 조선이 그런 사회였다. 시장이 없어 확산되지 않은 것에는 제품 외에 학문도 포함됐다. 조선 후기의 중요한 움직임으로 거론되는 실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실학은 논의됐으나 전해지지 않았다.

조선의 실학은 소수 학자와 제자 사이에서만 논의됐다. 실학 저술이 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출판은 조정에 의해 통제됐고, 민간 주도로 책을 간행하기 매우 어려웠다. 조선은 사실상 출판업과 출판시장이 없는 나라였다.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같은 대표적인 실학자의 저서도 끝내 출판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전해졌다. 실학자들의 저술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쇄됐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세계적인 출판강국이었다. 독자들이 원하는 읽을거리를 민간에서 책으로 찍어내면서 베스트셀러 소설이 나왔고 다양한 실용서가 간행됐다. 뿐만 아니다. 신문도 간행됐고 광고시장도 커졌다. 시장이 확대되고 유통 물량이 많아지면서 물류의 기반인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물자와 함께 사람이 움직였고, 이는 숙박업의 성장과 관광업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상행위의 중요한 기반인 화폐제도도 발달했다. 각 분야에서 조선은 어땠는가 하는 논의는 생략한다.

◆ 상인에게 자부심 주는 ‘상인도’ 가치관 형성

가치관 같은 상부구조는 경제체제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형성된다. 에도시대 상업자본이 축적되고 부유한 상인층이 형성되자 상업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모색된다. 그런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한 사상가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1685~1744)이다. 그는 상인의 이윤 추구가 멸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음을 당당히 선언했다. 나아가 무사에게 도(道)가 있는 것처럼 상인에게도 도가 있어야 함을 설파했다. 즉, 상인은 무사가 충(忠)으로 주군을 섬기듯 상인도 성(誠)으로 고객을 섬겨야 한다며 검약과 근면과 신용의 덕목을 강조했다. 그는 이런 도에 따라 정직하게 번 돈은 “후지산만큼 쌓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며 상인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었다.

가치관은 경제관계에 따라 형성되지만, 일단 형성된 가치관은 다시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각자의 이윤 추구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낳는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이 서구 자본주의의 사상적인 토대가 된 것처럼, 이시다 바이간의 상인도는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적인 기초 중 하나가 됐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smitten@naver.com

[책 정보]
신상목 지음,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274쪽, 뿌리와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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