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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최민식 나르시시즘 보고 있자니 짜증이 절로 난다
기사입력 :[ 2017-11-09 16:51 ]


‘침묵’, 사나이 순정(?)에 도취되어 하나 되는 남성연대라니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침묵>은 중국영화 <침묵의 목격자>(2014)의 리메이크 작으로, <해피엔드><은교> 등 파격적인 사랑영화를 찍어 온 정지우 감독의 신작이다. <해피엔드> 이후 18년 만에 최민식과 재회해 찍은 영화이자, 이하늬의 매력을 한껏 활용한 영화로 화제가 될 만하다.

<침묵>의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법정영화의 형태를 띠면서 두 번의 반전을 통해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 매끄럽게 그려져 있다. 배우들의 활용이나 카메라의 워크도 나무 날데 없다. 문제는 주제이다. 영화가 결말을 통해 전달하려는 감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곱씹어 보면, 괴상하고 불순한 무의식과 맞닥뜨리게 된다.



◆ 치정극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치정극이 아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은 남자 임태산(최민식), 그는 재즈가수 유나(이하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요트 위에서 5억원 짜리 명품 시계를 선물하던 날, 임태산의 딸이 유나를 불러낸다. 그날 밤 유나는 살해되고, 건물의 방제실이 불타 모든 CCTV 기록이 사라진다. 영화는 유나 살해 사건을 둘러싼 법정 공방을 보여준다. 유나의 섹스동영상이 등장하고, <어퓨 굿맨>의 잭 니콜슨이 떠오를 법한 오만한 남자의 뻔뻔한 진술이 등장한다. 추악한 치정극의 진실이 밝혀지는가 싶었지만, 영화 <침묵>이 도달한 결말은 ‘부도덕하게 살아온 한 남자의 순정과 부정’이다.

이러한 주제를 어찌 보아야 할 것인가. 잠깐 <해피엔드>를 떠올려보자. <해피엔드>는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된 남자의 완전범죄를 그린 영화였다. 부정을 저지르고 모성을 방기한 여자는 남편의 손에 처벌받고, 정부는 죄를 뒤집어쓴다. 영화는 부정한 아내를 처벌하는 남편을 잔혹한 마초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그의 선택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시선을 담고 있다. 역설적인 듯 한 영화의 제목은 감독의 가치 판단을 담고 있다. 즉 그런 결말이 ‘남편과 아이를 위한 최선’이요, 아내와 정부에게도 그들이 원하는 순애보를 선사한 셈이니, 최선의 결말이 아니겠냐는 묘한 추인이 담겨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뒤, 감독은 ‘치정극의 외피를 띄고 있으나, 치정극이 아닌’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결말을 통해 말한다. 당신은 임태산을 약혼녀의 섹스동영상에 격분하여 죽여 버리는 남자로 오인했겠지만, 그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우리의 주인공은 어른의 사랑을 할 줄 아는 남자라고. 그래서 섹스동영상 따위 다 알고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여자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해서 진실한 반성 속에서 심지어 자신을 벌주려 한다고.

부정한 여자를 처벌하는 남자를 추인하는 <해피앤드>를 만들었던 감독이 여자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처벌하려는 남자를 그린 <침묵>을 만들었으니, 나름 발전으로 보아야 할까. 외도하는 여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보편관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점에서 일종의 발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숙한 남성은 여성의 정조에 집착하지 않으며, 사랑과 용서로 감싸고, 남자로서 또 아버지로서 책임지는 주체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의식의 성장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남성주체의 무의식이 담겨있다.



◆ 이 남자의 숨겨진 진실, 순정과 부정에 감동하라고?

영화 <침묵>이 반전을 통해 드러내는 진실은 부도덕한 권력자의 순정과 부정이다. 그런데 그 순정과 부정이 영화전체를 통해 납득되는가. 영화는 ‘임태산과 유나의 관계’나 ‘임태산과 딸의 관계’를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순정과 부정이 우격다짐으로 느껴진다.

영화는 유나와 임태산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곤 결말을 통해 선언한다. ‘당신들은 임태산이 유나를 단지 돈으로 후렸을 것으로 오해했겠지만, 유나와의 관계는 진실했다’고. 그런데 유나도 진심으로 임태산을 사랑하고 있었을까. 영화는 마지막 태국장면에서 긴 여운을 지닌 유나의 표정을 보여주며 답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임태산의 망상이었다. 왜 유나는 추악한 속물 임태산을 사랑하는가? <은교>는 소녀가 노시인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를 나름 설득한다. 소녀는 외로웠고, 노시인을 통해 접한 문학의 세계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렇다면 젊고 아름다우며 성적 경험도 충분하고 아무런 결핍도 없어 보이는 ‘여신 급’의 유나가 왜 늙고 추하고 천박한 임태산을 사랑하는가. 영화는 그것은 두 사람의 내밀한 진실이며, 가장 친밀한 사람만 알아보는 순수가 임태산의 내면에 있다고 우긴다.



임태산의 부성애는 또 어떤가. 임태산은 성인이 된 딸을 어린 아이로 취급할 뿐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갑자기 유나를 소개했고, 유나와 딸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딸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임태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검사를 매수하려 하고, 부하에게 죄를 뒤집어쓰게도 하고, 딸의 무죄를 믿는 변호사를 고용하고, 증인을 설득해 조작된 증거를 전달하도록 한다.

이 모든 기획에서 딸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는 존재로 밀려난다. 뒤늦게 알게 된 딸이 반문한다. “내가 고마워해야 해?” 평생 딸을 대화상대로 인정한 적이 없는 임태산은 딸의 주체성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죄를 뒤집어쓴다. 딸이 스스로의 행위를 책임지고 반성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박탈된 채, 임태산은 도덕의 독재자를 자임한다. 이제 딸은 아버지의 과묵한 사랑에 감사하며 아버지를 존경할 일만 남았다.

자 정리해보자. 여기, 돈도 권력도 다 가진 남자가 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가 비열하고 탐욕적인 남자로 보이겠지만, 그의 내면에는 고결함이 들어있다. 아름다운 유나의 사랑도 돈이 아닌 진심으로 얻었으며, 마지막에는 거룩한 부성을 통해 그토록 얻기 힘들었던 딸의 존경마저 얻는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황송한 남성주체의 자기도취를 보았나.



◆ 신이 된 사나이, 스스로를 벌하다

영화 <침묵>은 늙고 추악해 보이는 초로의 남자 몸에 깃든 순정한 영혼을 진실의 이름으로 들이민다. 그런데 <은교>도 늙은 몸에 갇힌 순정한 영혼을 말하지 않았나. 늙은 시인은 재능과 명성, 그리고 좋은 집까지 지녔지만, 오직 하나 젊음을 잃었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는 젊은 영혼이 들어있다. 영화는 이를 납득시키기 위해 노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박해일에게 노인 분장을 시켰다. 여고생을 향한 늙은 시인의 마음이 노추가 아니라 순정임을 믿게 하려는 장치이다. 늙은 시인은 자신을 벌하는 방식으로 홀로 죽어가고, 여고생의 지극한 애도와 그리움을 얻는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오직 젊음만 갖지 못한 남자주인공이 젊은 여성의 사랑까지 얻는 서사를 보여주면서, 그것을 노욕이 아닌 순정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은교>와 <침묵>은 닮았다. 또한 주인공에게 스스로를 벌하는 주체의 지위를 허락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침묵>은 세상의 잣대로 부도덕한 인물로 인식되는 초로의 남성이 그토록 순수하고 거룩한 인간이었음을 역설한다. 그것도 사람들이 흔히 빠져있는 통념을 반전의 지렛대로 삼아,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이 있음을 강조한다. 즉 당신들이 생각하는 속물남성에 대한 통념은 오해이고, 그의 내면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도덕의 경지에 놓여 있으며, 그의 진실은 오직 신만이 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영화에서 임태산의 기획은 완벽하게 실현된다. 검사도 변호사도 열혈팬도 각자의 양심과 욕망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임태산이 스스로를 벌하는 계획이 완성된다. 임태산의 능력은 모든 사람을 조정하는 위치에 놓이며, 그를 처벌하는 사법시스템조차 그의 권능 아래 놓인다. 그는 스스로를 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세상 사람들을 자신의 장기 말로 활용하여 자신을 대속의 희생물로 삼는다. 즉 그는 전능하고 초월적인 주체로 신의 자리에 놓이면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물로 삼은 예수그리스도와 동급이 된다.



◆ ‘사나이 순정(?)’에 도취되어 하나 되는 남성연대

<해피엔드>에서 아내를 죽인 남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대신 정부가 처벌받는다.) <은교>에서 여고생을 사랑한 늙은 시인은 처벌받지 않는다. (대신 젊은 시인이 처벌받는다.) 늙은 시인은 스스로를 벌한다. <침묵> 역시 스스로를 벌한다. 나를 비판하고 벌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비대한 남성 자아가 느껴진다. 가령 <비밀은 없다>에서 그럴듯한 남성 정치인의 추악한 면모가 시시하게만 보였던 딸과 아내에 의해 까발려지고 처벌된다. 그러나 <침묵>에서는 비열한 사업가의 순정과 부성애가 남성주체의 자기처벌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완전히 상반된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비밀은 없다>가 남성권력에 대해 균열을 내는 영화라면, <침묵>이 ‘도덕마초’의 허위의식을 통해 남성권력을 강화하는 영화이다.

그가 남성 열성팬의 조력을 받는 대목도 흥미롭다. 열성팬은 “난 돈이 중요하지 않다. 사랑 가족 친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임태산이 그의 조력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임태산의 행위가 열성팬이 보기에 ‘사랑 가족 친구’를 위한 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어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아야 유나를 떠나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라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들렸고, 모니터 앞에서 우는 그의 눈물이 사랑으로 보였으며, 그의 계획들이 모두 가족을 위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나를 지극히 사랑하여 스토커 짓도 서슴지 않았으나 유나에게 용서받은 열성팬. 유나의 속옷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던 그가 임태산의 순정과 부성애에 감동을 받아 협조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감독이 생각하는 남성들 간에 공유될 수 있는 ‘사나이 순정’의 양태이다. 즉 스토커 짓을 하는 그도, 임태산처럼 딸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처벌하는 독단적인 부성도, 남자들끼리는 ‘우리 멋진 사나이들의 순정’으로 이해되고 의기투합 할 수 있는 행위라는 뜻이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추어주며 서로 감동받는 사나이들과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던 감독이 그 자리에 관객들을 초대한다. ‘가장 비열해 보이는 남성에게 속 깊은 순정과 과묵한 부성애가 숨어 있었다니, 크윽 감동이지 않습니까.’ 돈도 권력도 다 가진 늙다리 아저씨에게 아름다운 내면과 도덕까지 ‘몰빵’해주며 경배를 하랍 신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왜 우리가 그들의 숨겨진 내면까지 알아야 하냐고. 그들은 더 신랄하게 비판받아야 할 타락한 권력자들이 아니냐고. 그들이 부도덕해 보이는 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며, 오직 신만 아는 진실은 따로 있다는 기막힌 프로파간다를 어떻게 감히 할 수 있냐고.



‘그동안 타락한 권력자로 살아왔으며, 아버지로서 애인으로서 문제가 많았던 나이지만, 비판을 하더라도 오직 나만이 나를 비판할 있다’는 논리로, 모든 권력을 동원해 스스로를 벌주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을 보고 있자니, 경탄이 아니라 짜증이 절로 난다. 돈과 권력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뮤지션의 사랑과 딸의 존경까지 얻고 싶은 남성자아의 뻔뻔한 무의식이 느껴져 욕지기가 절로 난다. 남성주체들이여, 지금껏 권력을 누려왔으면 비판이라도 제대로 받을 생각을 하라. 당신의 딸과 여자가 주체가 되어 당신의 죄상을 철저히 까발릴 테니, 부디 딸과 여자를 인형으로 만들면서 스스로를 벌하고 스스로를 찬미하는 오지랖은 떨지 마라. 혹시 그것 아나?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은 아는 이가 없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침묵>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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