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옥’의 실패를 김혜수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시대가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영화 <미옥>의 홍보 포인트는 “여성이 주인공인 느와르”였다. 여주인공의 이름을 내세운 간명한 제목에, 김혜수의 스타일리시한 얼굴이 전면을 장식하는 포스터는 여성중심의 영화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그러한 홍보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하기야 지독한 남성중심의 나르시시즘을 전시한 영화 <침묵>도 ‘백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라는 홍보문구를 내세우며,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임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이런 움직임은 여성주의가 영화의 흥행에 도움이 된다는 업계의 판단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VIP]의 흥행실패 이후, 관객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하고, 무엇에 질렸는지 시장의 촉수가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시장에 나온 물건들은 이미 낡은 기획에 의해 제작된 것들이다. 이를 팔기 위해 제목을 ‘소중한 여인’에서 ‘미옥’으로 바꾸고 김혜수를 중심에 내세운다 한들, 뚜껑을 열어보면 영화의 구태를 감출 길이 없다.



◆ 여성중심의 느와르라고?

<미옥>이 정말로 여성중심의 느와르였다면 굉장한 지지와 호평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지독한 남성중심의 영화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호텔의 각방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성접대와 그것을 CCTV 화면으로 조망하며 지휘하는 현정(김혜수)을 보여준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성접대 장면이 길게 이어지며, 이를 사업 확장을 위한 미끼로 활용하는 과정이 등장한다. 영화 <미옥>은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장면을 마치 선망이라도 하듯 자세히 보여주는 반면, 조직 안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어떤 감정들을 쌓아 가는지는 서걱서걱 지나간다. 매끄럽지 못한 편집을 거쳐, 선정적이고 잔혹한 장면들만 뇌리에 남고,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들을 벌이는지 몰입하기 어렵다.

현정(김혜수)은 조직의 2인자로 대체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지만, 영화에서 사건을 추동하는 인물은 현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현정을 짝사랑해왔으며, 조직의 궂은일을 도맡아 온 임상훈(이선균)이다. 조직의 자금줄을 캐다가 성접대로 덜미가 잡힌 비리검사 최대식(이희준)은 임상훈에게 조직의 후계구도와 현정의 비밀을 알려준다. 후계구도에서 자신이 완전히 밀렸으며, 현정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 임상훈은 꼭지가 돈다. 그는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가 그러하듯, 조직을 작살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현정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김혜수의 몸을 입은 현정은 아름답고 신비하고 독특한 개성을 내뿜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인물인지 알기 어렵다. 그는 임상훈의 뇌리에서 회상되는 ‘소중한 여인’이거나 비리 검사의 입으로 브리핑되는 ‘창녀, 칼잡이, 보스의 여자, 어머니’라는 약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리고 경쟁조직의 권율로부터 “밑구녕 장사하면서, 불알달린 척 한다”고 일갈되는 명예남성이다. 한편 현정이 스스로 말하는 자신의 욕망은 ‘은퇴하고 싶다’는 것뿐이다.

요컨대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일을 하며 그 자리에 올라간 명예남성인 인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영화는 그의 시선과 입장을 할애하지 않는다. 현정은 조직 안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내는 걸출한 능력자이자만, 보스와 임상훈과 비리검사와 경쟁조직 눈에 의해서는 끊임없이 대상화되는 존재이다. 즉 욕망하지만 가질 수 없는 연상의 여인이자, 창녀이자 어머니로 파편화되는 이미지로 남을 뿐, 현정이 어떤 욕망과 의지를 지닌 주체인지 알기 어렵다.



◆ 흔적처럼 남은 여성연대

<악녀>가 나왔을 때도 비슷한 비판이 있었다. 강렬한 액션을 선보이는 여성 킬러를 내세우지만, 그를 ‘사랑에 속고 모정에 우는’ 여리고 착한 여인으로 그린 감독의 여성관이 얼마나 진부한지 비판되었다. <미옥>은 그보다 더 하다. 현정은 자기 욕망을 지닌 주체도 아니고, 남성의 눈에 포획된 불균질한 이미지로 흩어진다. ‘은퇴하고 싶다, 아들에게 이 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그의 목표는 피상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가 어떤 환멸과 자성을 통해 도출한 결론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감독이 환상적인 현정의 이미지를 뽑는 데에만 주력했을 뿐, 한 번도 현정의 입장에서 사고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독한 남성 중심 조직에서 유리천정을 뚫어가며 능력과 성취를 인정받은 여성인력을 업무상의 동료로 사고하지 않고, 언제나 이성애의 대상이거나 모성애의 담지자로 사고해왔음을 실토하는 격이다.



차라리 <조폭 마누라>의 주인공은 훨씬 감정이입이 쉬운 인물이다. 그는 모든 남성 조직원들에게 ‘형님’으로 불리는 명예남성이었으며, 직업적 성취와 더불어 자신이 주도하는 사적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여성주체였다. 한편 <차이나타운>은 남성 중심 조직의 구조와 생리를 그대로 둔 채, 성별만 바꾸었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었다. 오이디푸스적인 권력승계와 비현실적으로 해맑은 연인 박보검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성차 패러디를 보여주는 영화였지만, 인물의 욕망이 모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미옥>은 현정의 욕망을 오리무중의 것으로 만든다. 남는 것은 웨이(오하늬)와 대비되는 현정의 독보적인 존재감뿐이다. 영화는 두 여자를 대비시키며, 젊고 아름답고 성적 능력이 뛰어난 웨이는 ‘그래봤자 비싼 창녀’일 뿐이며, 현정에게는 그와는 다른 신비한 매력이 있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식의 구도로 인해, 현정이 웨이에게 품는 배려도 빛이 바랜다. 영화에는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안소영이 분한 김여사와 현정의 깊은 신뢰나 현정이 웨이에게 품은 자매애 등 여성적 연대를 드러낼 요소를 지니지만, “오백만원의 화대” 운운하는 자극적인 대사 속에 휘발되고 만다.



현정은 시종 광휘에 찬 아름다움과 우수를 흩뿌리지만, 영화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빈약한 영화의 틈새를 메운 것은 순전히 김혜수의 힘이다. 김혜수는 최고의 연기와 매력을 발산했지만, 여성주체의 욕망을 사고하지 못한 감독으로 인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부디 영화의 실패가 김혜수의 실패로 잘못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미옥>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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