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사’ 김래원, 판타지에 이런 안정감을 준다는 건

[엔터미디어=정덕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KBS 수목드라마 <흑기사>에서는 이런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판타지적인 장르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드라마가 앞으로 하려는 이야기의 중요한 메시지라고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고 없는 이들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없는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 주는 절망감. <흑기사>는 그 절망감을 판타지를 통해 넘어서려 한다.

그것은 판타지로의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100년도 못 살고 죽을 것이 예정된 인간의 삶 속에서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가진 자는 더 가지기 위해, 없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그 삶을, 죽지 않는 자들을 통해 돌아보는 것이다. 갑질이 일상인 일터에서 살아가며 믿었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정해라(신세경)는 같이 사는 이모가 덜컥 반전세금을 빼고 대출까지 얻어 허물어져 가는 한옥집을 샀다는 이야기에 절망한다.

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 만나게 된 불사의 존재 샤론(서지혜)에 의해 코트를 얻게 되고 그 후로 행운이 이어진다. 정해라는 여행사 일 때문에 슬로베니아로의 첫 해외여행을 가게 되고 거기서 그의 흑기사 문수호(김래원)를 만나게 된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행복감에 눈물을 흘리고, 더 깊은 행복에 빠지는 것이 오히려 두려워지는 정해라의 불행한 현실과 그 속에서 오히려 더 커지는 행복은 그것이 순간과 찰나에 머물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문수호가 찍어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정해라의 모습처럼.



반면 샤론 같은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며 200년 넘게 살아온 불사의 존재들은 그것이 축복이 아닌 ‘저주’라고 말한다. 과거에 정해라에게 했던 어떤 죄로 인해 생겨난 이 불사의 삶을 그는 왜 저주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와 비슷한 존재였으나 최근 들어 저주가 풀려 나이 들어가는 장백희(장미희)는 그래서 그런 ‘인간적인 삶’ 속에서 더 행복감을 느낀다. 샤론양장점을 운영하며 갖가지 아름다운 옷들을 만들어내지만 샤론은 그 옷이 주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나이 들기 시작한 장백희는 이런 저런 옷들을 입어 보고픈 욕망의 행복을 구가한다.

<흑기사>는 눈에 보이는 세계(결국 우리는 모두 사멸해간다는)가 주는 절망감이 사실은 불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그 안에서 박곤(박성훈)의 아버지 박철민(김병옥)처럼 늙지 않고 싶다고 말하고 더 많은 걸 가지려 안간힘을 쓰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은연 중에 드러낸다. 박철민은 가난한 자들의 집을 사서 재개발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지만, 그 낡아지고 사멸해가는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문수호는 그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모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벌어지는 걸 막는 일을 한다고 한다. 자본이 들어와 본래 있던 것들을 밀어내는 걸 자본으로 지켜내는 흑기사. 그는 그래서 정해라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울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냐”고 묻고는 “앞에 있는 남자의 가슴이 뛴다”고 말하는 흑기사이면서, 동시에 자본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것들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흑기사이기도 하다.

판타지를 그리는 드라마에서 문수호 같은 주인공의 역할은 결코 쉽지 않다. 판타지가 본래 현실의 무게를 벗어나 가볍게 휘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게 공중으로 붕붕 떠오르는 판타지적인 공기에 어떤 진중함과 무게감을 더해 안정감을 주는 캐릭터의 역할은 실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수호 역할을 하고 있는 김래원은 이 드라마의 진정한 ‘흑기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특유의 낮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와 단단한 연기가 주는 어떤 ‘든든함’이 현실과 비현실을 섞어, 순간과 영원을 이어내는 드라마를 꾹꾹 눌러주고 있어서다. 그의 연기를 통해 이 드라마는 멜로 판타지는 물론이고 그 안에 담아낸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사회적 현실에 대한 메시지까지 이 드라마가 담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주고 있다. 왜 김래원을 믿고 보는 배우라 하는지 <흑기사>를 보니 확실히 알겠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그 이상의 것들을 연기로 끌어내고 있으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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